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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고문운동은 좌우 대칭으로 화려하게 꾸민 변려문 대신, 한나라 이전의 뜻이 잘 통하는 소박한 산문으로 글을 쓰자는 문장 개혁 운동이에요. 한유가 유종원과 함께 그 맨 앞에 서서 이끌었습니다.
송나라의 대문호 소식은 한유를 이렇게 기렸어요.
"文起八代之衰(문기팔대지쇠)", 곧 "그의 문장은 여덟 왕조에 걸친 문풍의 쇠퇴를 일으켜 세웠다"는 말이에요.
수백 년 동안 시들어 있던 글쓰기를 한 사람이 다시 일으켰다는 칭찬이지요.
한유(768년부터 824년까지 살았어요)가 유종원과 함께 이끈 '고문운동(古文運動)'이 바로 그 일이에요.
어렵게 들리지만 핵심은 간단해요.
당시 유행하던 화려하게 꾸민 문장, 곧 '변려문(騈儷文)'을 버리고, 한나라 이전의 소박하고 논리가 또렷한 산문, 즉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거든요.
'옛 고(古)'에 '글월 문(文)', 말 그대로 옛날식 산문이라는 뜻이에요.
변려문을 오늘날에 빗대면 결혼식 청첩장 문구 같아요.
넉 자, 여섯 자로 글자 수를 딱딱 맞추고, 좌우가 거울처럼 대칭을 이루고, 듣기 좋은 미사여구를 잔뜩 넣지요.
보기에는 예쁘지만 정작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싶을 때가 많아요.
형식이 뜻을 눌러 버린 셈이에요.
고문은 반대로 친구에게 쓰는 편지에 가까워요.
글자 수를 억지로 맞추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러운 순서로, 앞뒤가 맞게 풀어 쓰지요.
둘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게 달라요.
| 구분 | 변려문 | 고문 |
|---|---|---|
| 문장 짜임 | 넉 자·여섯 자 짝을 맞춤 | 짝을 맞추지 않고 뜻대로 |
| 무엇을 앞세우나 | 겉모양의 아름다움 | 뜻과 논리 |
| 느낌 | 꾸민 청첩장 | 자연스러운 편지 |
| 본보기 시대 | 육조 시대의 화려한 글 | 한나라 이전의 소박한 글 |
한유가 보기에 변려문은 껍데기만 남은 글이었어요.
대구를 맞추고 어려운 표현을 넣느라, 정작 전하려는 생각은 흐려졌으니까요.
그는 문장이란 뜻을 담는 그릇이라고 여겼어요.
그릇이 아무리 번쩍여도 담긴 것이 비었으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형식의 굴레를 풀고, 옛 사람들처럼 뜻이 곧게 서는 글로 돌아가자고 한 거지요.
한유 자신의 글을 보면 그 차이가 느껴져요.
「진학해(進學解)」의 한 대목이에요.
"业精于勤而荒于嬉,行成于思而毁于随(업정어근이황어희, 행성어사이훼어수)", 곧 "학업은 부지런함에서 정밀해지고 놀이에서 황폐해지며, 행실은 깊이 생각함에서 이루어지고 제멋대로 함에서 무너진다"는 말이에요.
억지로 꾸미지 않았는데도 뜻이 또렷하고, 오히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지요.
이런 글이 바로 한유가 되살리려던 고문이에요.
선구란 남보다 앞서 길을 낸 사람을 말해요.
한유가 활동하던 때만 해도 변려문이 워낙 대세여서, 소박한 산문으로 쓰겠다고 나서는 건 유행을 거스르는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한유는 유종원과 나란히 그 흐름을 앞장서서 열었고,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지요.
그 영향은 오래갔어요.
명나라 학자 모곤은 후대에 이름난 산문가들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으면서, 한유를 그 첫머리에 두었어요.
여덟 명 가운데 맨 앞이라는 건, 이 흐름의 출발점이 한유라는 인정인 셈이에요.
물론 모두가 칭찬만 한 건 아니에요.
훗날 주희는 "裂道與文以爲兩物(열도여문이위양물)", 곧 "도(道)와 문(文)을 갈라 두 가지 것으로 만들었다"며, 한유가 글솜씨에 너무 기울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굳어진 문장을 흔들어 새 길을 낸 첫 사람이라는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어요.
고문운동은 화려하게 꾸민 변려문을 버리고, 뜻이 곧게 통하는 옛 산문으로 돌아가자는 문장 개혁이었어요.
청첩장 같은 글에서 편지 같은 글로 방향을 튼 셈이지요.
한유는 유종원과 함께 이 흐름의 맨 앞에 서서, 형식보다 뜻을 앞세운 글이 어떤 것인지 자기 문장으로 보여 주었어요.
그래서 그는 유행을 거슬러 길을 낸 '선구'로, 또 당송팔대가의 첫머리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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