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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서기 819년, 당나라 황제가 부처의 사리를 대궐로 모셔 오려 하자 한유는 상소를 올려 반대했어요. 부처는 본래 중국 밖에서 온 외래 종교의 인물이니, 그 뼈를 황궁에 들여 떠받드는 일은 나라의 근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좋아하는 아이돌의 물건이 온다고 하면 온 동네가 들썩이잖아요.
819년 당나라에서 딱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법문사(法門寺)라는 절에 모셔 둔 부처님의 사리, 그러니까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황제 헌종(憲宗)이 직접 궁궐 안으로 들여오게 한 거예요.
온 나라가 열광했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재물을 바쳤죠.
이때 한 신하가 "이건 아닙니다" 하고 정면으로 반대하는 글을 올렸어요.
그 사람이 바로 한유(韓愈, 768년부터 824년까지 살았던 당나라의 문장가이자 유학 부흥 운동가)예요.
그가 올린 글이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 흔히 「논불골표(論佛骨表)」라고도 불리는 상소예요.
제목을 풀면 '부처 뼈 맞이하는 일을 말리는 글'이라는 뜻이죠.
황제가 하려는 일을 신하가 대놓고 막아섰으니, 요즘으로 치면 회사 대표의 대형 프로젝트에 신입이 손을 들고 "중단하시죠"라고 말한 셈이에요.
한유의 논리는 의외로 단순하고 셌어요.
핵심은 '부처는 우리 사람이 아니다'였죠.
그는 이렇게 못을 박아요.
佛本夷狄之人 (불본이적지인)
— 부처는 본래 오랑캐(夷狄) 사람이다.
여기서 '이적'은 중국 바깥, 즉 외국에서 온 존재라는 말이에요.
한유가 보기에 불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외래 종교였고, 중국 고유의 옛 성인들이 가르친 도리와는 뿌리가 다르다는 거였죠.
남의 나라 명절을 우리 왕실 공식 행사로 삼는 게 어색하다고 느끼는 마음과 비슷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유는 무서운 예까지 들어요.
불교를 열심히 믿은 옛 황제들이 오히려 일찍 죽거나 나라를 잃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결론짓죠.
事佛求福,乃更得禍。由此觀之,佛不足信,亦可知矣。
—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하다가 오히려 화를 얻었으니, 이로 보건대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됨을 또한 알 수 있다.
복 받으려고 한 일이 도리어 화를 불렀다는 지적이에요.
게다가 한유는 승려들이 밭도 갈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살아가니 나라 살림에 보탬이 안 된다고도 봤어요.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질서의 문제로도 파고든 거죠.
결과부터 말하면 한유는 큰일 날 뻔했어요.
헌종은 이 글을 읽고 크게 노해서 한유를 아예 사형에 처하려 했거든요.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황제가 온 마음을 쏟은 행사에 대고 "그거 믿으면 화 입습니다"라고 했으니 심기가 뒤집힐 만도 했죠.
다행히 배도(裴度)와 최군(崔群) 같은 대신들이 나서서 "뜻은 충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간곡히 말린 덕분에 목숨은 건졌어요.
대신 저 멀리 남쪽 조주(潮州)의 자사로 좌천되고 말죠.
수도에서 오지로 쫓겨난 셈이에요.
훗날 송나라의 문장가 소식(蘇軾)은 이 일을 두고 한유를 이렇게 기렸어요.
忠犯人主之怒 (충범인주지노)
— 그의 충성은 군주의 노여움을 무릅썼다.
벌 받을 걸 알면서도 바른말을 했다는 점에서, 한유의 이 상소는 '충직한 신하'의 상징처럼 두고두고 이야기돼요.
참고로 좌천된 조주에서 한유는 「제악어문(祭鱷魚文)」을 지어 악어를 몰아내는 의식을 치렀고, 백성들이 그를 기려 훗날 그 지역 강을 한강(韓江)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어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있어요.
이 상소만 보면 한유가 불교라면 치를 떠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어요.
그는 조주로 쫓겨간 뒤 그 지역의 대전화상(大顛和尚)이라는 승려와 어울리며 시와 글을 주고받는 걸 꺼리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한유가 겨눈 건 '불교를 믿는 개개인'이 아니라,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외래 종교의 유골을 국가 행사로 떠받드는 그 '방향'이었다고 보는 게 정확해요.
그가 지키려 한 건 요임금과 순임금, 공자와 맹자로 이어지는 중국 고유의 도리, 즉 유학의 자리였죠.
아래처럼 정리하면 헷갈리지 않아요.
| 구분 | 한유가 반대한 것 | 한유가 반대하지 않은 것 |
|---|---|---|
| 대상 | 황제가 불사리를 국가 행사로 떠받드는 일 | 승려 개인과 나누는 교류 |
| 이유 | 외래 종교가 나라의 근본 자리를 차지함 | 시문을 주고받는 개인적 우정 |
한유의 「간영불골표」는 819년, 황제가 부처 사리를 궁으로 들이려 하자 "부처는 본래 외래의 인물이니 그 뼈를 대궐에서 떠받들어선 안 된다"고 정면으로 막아선 상소예요.
그 대가로 사형 위기까지 갔다가 조주로 좌천됐지만, 벌을 각오하고 바른말을 했다는 점에서 충직한 문장가의 상징으로 남았죠.
다만 그가 불교 자체를 통째로 미워한 것은 아니었어요.
나라의 근본 자리를 지키려던 유학자의 태도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 글의 뜻이 또렷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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