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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인욕바라밀은 화를 억지로 눌러 참는 게 아니라, 화가 날 상황을 다시 바라보아 마음속에서 분노 자체가 옅어지게 하는 수행이에요. 샨티데바는 이 인욕을 보살이 반드시 완성해야 할 덕목으로 삼았어요.
줄을 서 있는데 누가 새치기를 했다고 해봐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어져요.
바로 이 지점, 화가 올라오는 그 자리를 어떻게 다룰지가 인욕바라밀이 말하는 문제예요.
인욕바라밀은 산스크리트로 크샨티 파라미타(kṣānti-pāramitā), 한자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에요.
인욕(忍辱)은 '모욕을 참고 견딤', 바라밀(波羅蜜)은 파라미타의 소리를 옮긴 말로 '완성'을 뜻해요.
그래서 인욕바라밀은 '참는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 완성하는 것'이에요.
8세기 인도 날란다(那爛陀) 대사원의 승려였던 샨티데바(Śāntideva, 寂天)는 자신의 대표작 『입보살행론(入菩薩行論)』 안에 이 인욕을 따로 다루는 장을 두고, 보살이 걸어야 할 길의 한 축으로 정성껏 설명했어요.
샨티데바가 인욕을 강조한 이유는 그 반대편에 있는 분노(krodha, 성냄)를 아주 위험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에요.
불교에서는 마음을 괴롭히고 흐리는 것들을 번뇌(kleśa, 클레샤)라고 불러요.
분노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번뇌예요.
샨티데바는 갈애(taṇhā, 목마른 듯한 집착)나 분노 같은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이라고 보았어요.
왜 하필 분노일까요.
화는 나 자신부터 태워요.
밤새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으면 정작 잠 못 이루고 속이 끓는 사람은 나예요.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자고 있는데 말이죠.
샨티데바는 애써 쌓아 올린 마음의 평화가 단 한 번의 성냄으로 무너질 수 있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밖에 있는 적을 이기는 것보다,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는 인욕이 더 근본이라고 가르친 거예요.
뒷날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1997년 『Healing Anger(성냄을 치유하기)』라는 책에서 바로 이 인욕의 장을 풀어 설명했어요.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해요.
인욕은 '이 악물고 참기'가 아니에요.
억지로 참으면 화는 그대로 남아서 마음 밑바닥에 쌓이고, 언젠가 더 크게 터져요.
인욕은 화가 날 상황 자체를 다시 바라보아서, 분노가 처음부터 크게 자라지 않게 하는 쪽에 가까워요.
| 억지로 참기 | 인욕바라밀 |
|---|---|
| 화는 그대로 두고 겉만 누름 | 화가 난 이유를 다시 살펴봄 |
| 속에 쌓였다가 나중에 터짐 | 마음에서 분노가 옅어짐 |
| 상대를 미워하며 견딤 | 상대까지 이해의 대상으로 봄 |
샨티데바는 한 걸음 더 나아가요.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조차 인욕을 연습하게 해주는 고마운 상대로 볼 수 있다고 권해요.
나무를 밀어야 근육이 붙듯, 거슬리는 사람이 있어야 참는 힘도 자란다는 거예요.
미운 사람을 '내 인욕을 키워주는 선생님'으로 바꿔 보는 시선, 이게 인욕바라밀의 묘미예요.
인욕은 8세기 승려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운전하다 끼어드는 차, 무례한 댓글, 말이 안 통하는 가족 앞에서 우리는 매일 작은 시험을 봐요.
이때 인욕은 '무조건 참아라'가 아니라, 화가 올라오는 그 짧은 순간에 '지금 화를 내면 손해 보는 건 누구지'를 한 번 되묻는 힘이에요.
샨티데바의 인욕이 남다른 점은, 이것을 개인의 감정 관리로만 두지 않았다는 데 있어요.
그는 인욕을 보살이 걷는 길의 한 부분으로 보았어요.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평화로 결국 다른 사람을 돕는 데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것, 그게 인욕을 '완성한다(바라밀)'는 말의 뜻이에요.
인욕바라밀(kṣānti-pāramitā, 忍辱波羅蜜)은 화를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화가 날 상황을 다시 보아 분노 자체를 옅게 만드는 수행이에요.
샨티데바는 분노를 마음을 태우는 번뇌로 보았고, 그것을 다스리는 인욕을 『입보살행론』 안에서 보살의 덕목으로 정성껏 설명했어요.
미운 사람마저 참는 힘을 키워주는 선생님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렇게 지킨 마음의 평화로 남을 돕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욕을 완성한다는 말의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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