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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바르트리하리는 말과 세상의 뿌리가 따로 있지 않다고 봤어요. 궁극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곧 '말씀(샤브다)'이며, 그래서 언어는 세상을 가리키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의 바탕이라는 뜻이에요.
혹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같은 문장을 들어 본 적 있나요?
인도에도 이와 비슷하면서 아주 깊게 파고든 생각을 한 사람이 있어요.
대략 5세기경 인도 우자인에서 살았던 언어철학자 바르트리하리(भर्तृहरि)예요.
문법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핵심 주장은 딱 한 줄로 요약돼요.
궁극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곧 '말씀'이라는 거죠.
이걸 산스크리트로 '샤브다-브라흐만(Shabda-Brahman)'이라고 불러요.
'샤브다'는 말·소리·언어를 뜻하고, '브라흐만'은 세상 전체의 뿌리가 되는 궁극의 실재를 뜻해요.
두 낱말을 붙였으니 '말씀인 브라흐만', 즉 언어가 곧 궁극의 실재라는 선언이에요.
그는 이 생각을 『바키야파디야』라는 책에 담았는데, 그 첫 부분 이름이 아예 '브라흐마-칸다(브라흐만의 서)'예요.
언어의 형이상학, 그러니까 말의 가장 깊은 바탕을 다루는 부분이죠.
우리는 보통 말을 '이름표'라고 생각해요.
사과가 먼저 있고, 거기에 '사과'라는 이름을 나중에 붙였다고요.
그런데 바르트리하리는 이 순서를 살짝 뒤집어요.
말이 사물 뒤에 붙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세상 그 자체의 바탕이라는 거예요.
왜 이렇게 봤을까요?
한번 시험해 볼게요.
'빨강'을 언어도 개념도 없이 순수하게 떠올릴 수 있을까요?
막상 해 보면 어려워요.
우리가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 이미 그 앎은 말로 짜여 있거든요.
바르트리하리는 언어와 인식이 이렇게 딱 붙어 있다고 봤어요.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세상이 애초에 '말로 된 세상'이라면, 세상의 바탕과 말의 바탕은 결국 하나인 셈이죠.
그는 이 하나의 '말씀'이 우리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세 단계로 펼쳐진다고 설명하기도 했어요.
| 단계 | 산스크리트 이름 | 무슨 일이 일어나나 |
|---|---|---|
| 1 | 파샨티(Paśyanti) | 말하는 사람 마음속에서 개념이 씨앗처럼 잡힘 |
| 2 | 마디아마(Madhyamā) | 그 씨앗이 속에서 말의 형태로 펼쳐짐 |
| 3 | 바이카리(Vaikharī) | 듣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소리가 되어 나옴 |
하나의 씨앗이 안에서 밖으로 자라나듯, 말도 그렇게 펼쳐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말은 겉으로 들리는 소리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 되죠.
바르트리하리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이거예요.
그는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면 영적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봤어요.
문법 시험 이야기가 아니라, 말의 바탕을 끝까지 파고드는 공부를 말해요.
논리는 이래요.
말씀이 곧 브라흐만이라면, 말을 깊이 파고드는 일은 곧 궁극의 실재에 다가가는 일이 돼요.
흙탕물을 가라앉히면 바닥이 비치듯, 말의 겉모습을 지나 그 근원까지 맑게 들여다보면 브라흐만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에게 언어 공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세상의 뿌리에 닿는 수행이었던 셈이에요.
한 가지 정직하게 덧붙이면, 바르트리하리가 언제 살았는지는 자료마다 갈려요.
영어권 자료는 대략 485년부터 540년 사이로, 중국어권 자료는 570년부터 651년 사이로 적어요.
심지어 언어학자와 시인이 사실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고요.
그래서 생몰 연대는 하나로 못 박기보다 '아직 논쟁 중'이라고 기억해 두는 편이 정확해요.
바르트리하리의 '말씀이 곧 브라흐만(샤브다-브라흐만)'은, 말이 세상 뒤에 붙는 이름표가 아니라 세상의 바탕 그 자체라는 생각이에요.
우리의 앎이 이미 말로 짜여 있으니, 궁극의 실재인 브라흐만과 말씀은 뿌리에서 하나라는 거죠.
그래서 그에게는 말의 근원을 파고드는 문법 공부가 곧 해탈로 가는 길이었어요.
다음에 '사과'라는 말을 떠올릴 때, 이름이 사물에 붙는 것인지 아니면 말이 먼저 세상을 열어 주는 것인지 한 번쯤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그게 바로 바르트리하리가 던진 물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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