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열반은 어떤 물건이나 장소가 아니라, '있다'거나 '없다'는 말로 가리키려는 순간 어긋나 버리는 자리예요. 그래서 승조는 열반에 딱 맞는 이름이 없다(無名)고 했어요.
"열반이 뭐예요?" 하고 물으면 보통 '괴로움이 다 꺼진 편안한 경지'라고 답해요.
그런데 승조는 여기에 한 겹을 더 얹어요.
열반에는 이름이 없다(無名), 어떤 말로도 콕 집어 가리킬 수 없다는 거예요.
'열반무명(涅槃無名)'은 바로 이 생각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단맛'을 말로 설명한다고 상상해 봐요.
"달다는 건 이런 느낌이야"라고 아무리 길게 말해도, 직접 혀에 닿기 전엔 하나도 안 통하죠.
열반도 그래요.
말로 아무리 그려 놔도, 그 말은 진짜 열반이 아니라 열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에요.
승조(僧肇, 384년부터 414년까지)는 후진 시대 중국 스님으로, 공(空)을 가장 잘 풀이해 '해공제일(解空第一, 공을 이해함이 제일)'이라 불린 사람이에요.
그가 남겼다고 전하는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이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따진 글이고요.
이름이나 개념은 원래 대상을 '나눠서' 붙잡는 도구예요.
'있다'와 '없다', '여기'와 '저기', '큰 것'과 '작은 것'처럼 둘로 갈라야 말이 성립하죠.
그런데 열반은 이 나눔 자체를 넘어서 있어요.
열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걸 저 앞에 놓인 어떤 물건처럼 여기게 돼요.
반대로 '없다'고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둘 다 빗나가요.
마치 지도 위에 한 점을 찍어 표시하려는데, 정작 그 대상이 지도 바깥에 있는 것과 같아요.
지도의 좌표라는 도구로는 애초에 잡히지 않는 거죠.
그래서 열반은 '있다/없다'라는 이름표가 붙는 자리가 아니라고 본 거예요.
《열반무명론》은 재미있게도 혼자 결론을 선언하지 않아요.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이라는 두 목소리를 등장시켜, 서로 묻고 답하며 다투게 해요.
열반의 본바탕(體性)에 이름이 붙느냐 안 붙느냐를 놓고 벌이는 토론인 셈이에요.
두 입장을 나란히 놓으면 이래요.
| 목소리 | 열반을 보는 방식 |
|---|---|
| 유명(有名) | 열반은 닦아서 이르는 뚜렷한 목표. 이름도 있고 단계도 있다 |
| 무명(無名) | 열반은 말과 이름을 넘어선 자리. 어떤 이름으로도 붙잡을 수 없다 |
이 변론에는 또 하나의 물음이 얽혀 있어요.
바로 열반과 수증(修證)의 관계, 즉 '열반은 열심히 닦아서 얻어 내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에요.
목표라고 하면 이름이 필요하지만, 이름을 넘어선 자리라면 '얻는다'는 말도 조심스러워지죠.
글은 이 둘을 팽팽히 맞세우면서, 열반을 함부로 개념 상자에 넣지 못하게 우리를 붙잡아요.
여기서 솔직하게 짚어야 할 게 있어요.
《열반무명론》은 학계가 승조의 진짜 저작으로 확정한 글은 아니에요.
승조의 진작으로 확정된 건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을 비롯한 일곱 편 정도이고, 《열반무명론》은 위작 의혹(疑僞)이 있는 글로 분류돼요.
그러니 이 글의 문장 하나하나를 곧바로 승조 본인의 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날 진(陳)나라 때 사람들이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열반무명론》을 한데 묶고 〈종본의(宗本義)〉를 붙여 《조론(肇論)》이라 이름 붙였고, 이 합본이 널리 읽히는 통행본이 됐어요.
그래서 오늘날 '열반무명'은 승조의 이름과 함께 전해지지만, 그 안엔 후대의 손길이 섞였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아요.
'열반무명'은 열반에 딱 맞는 이름이 없다는 생각이에요.
열반은 물건도 장소도 아니어서, '있다/없다'는 말로 가리키려는 순간 어긋나 버려요.
갓난아기에게 단맛을 말로 설명 못 하듯, 언어로는 진짜를 잡을 수 없다는 거죠.
《열반무명론》은 '유명'과 '무명' 두 목소리를 맞세워 이 문제를 토론으로 풀어내요.
단, 이 글은 승조의 진작으로 확정되지 않은 위작 의혹이 있는 문헌이라, 《조론》에 묶여 전할 뿐 그대로 승조의 말로 못 박기는 어렵다는 점만 함께 기억하면 돼요.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