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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귀무론(貴無論)은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有, 있는 것)이 존재하려면 그 바탕에 아무것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무(無, 없음)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본 생각이에요. 왕필은 그 '없음'을 만물의 뿌리로 두고 가장 귀하게 여겼어요.
위나라의 학자 하안(何晏)은 자기가 쓰던 『노자』 주석을 다 짓지 못한 채 왕필의 주석을 보고는, 그의 풀이가 자기 것보다 정교하다고 인정하고 붓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세설신어』에 전해요.
그 왕필이 226년부터 249년까지, 스물 남짓한 짧은 생에 붙든 생각이 바로 '무(無)를 귀하게 여긴다'는 귀무론이에요.
귀무론을 한마디로 하면 "있는 것들의 뿌리는 없음이다"예요.
우리 눈앞엔 나무·돌·사람처럼 '있는 것(有)'이 가득하죠.
그런데 왕필은 이 모든 있는 것이 스스로 생겨나 스스로 버티는 게 아니라, 아무것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텅 빈 바탕, 곧 무(無)에서 나오고 무에 기댄다고 봤어요.
그래서 가장 근본이자 가장 귀한 것은 화려한 '있음'이 아니라 조용한 '없음'이라는 거예요.
참고로 '귀무론'이라는 이름 자체는 후대 학자들이 왕필의 사상을 요약하며 붙인 말이고, 왕필은 주로 노자 『도덕경』과 『주역』에 붙인 주석을 통해 이 생각을 풀어냈어요.
방 하나를 떠올려 볼게요.
우리가 방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벽과 기둥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안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에요.
벽만 꽉 차 있고 빈 공간이 없다면 그건 방이 아니라 그냥 벽돌 덩어리죠.
컵도 마찬가지예요.
컵을 쓸모 있게 만드는 건 도자기 몸통이 아니라 물을 담을 수 있는 가운데 빈 곳이에요.
왕필의 눈에는 세상이 이렇게 보였어요.
눈에 보이는 '있음'은 저마다 모양이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다는 건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라, 크면 작을 수 없고 따뜻하면 차가울 수 없죠.
그런데 만약 세상의 근본이 이렇게 하나로 정해진 '있음'이라면, 그 근본은 다른 온갖 것들을 다 담아낼 수가 없어요.
반대로 아무 모양도 없는 '없음'이라야, 큰 것도 작은 것도 따뜻한 것도 차가운 것도 다 그 안에서 나올 수 있어요.
텅 비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을 낳고 받쳐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필은 '없음'을 만물이 돌아가 기대는 뿌리로 본 거예요.
귀무론에서 有(있음)와 無(없음)는 서로 반대말이 아니라, 뿌리와 가지 같은 관계예요.
헷갈리기 쉬우니 표로 정리해 볼게요.
| 구분 | 유(有, 있음) | 무(無, 없음) |
|---|---|---|
| 뜻 | 모양·이름이 정해진 만물 | 아무것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바탕 |
| 예 | 나무·돌·사람 | 그 모든 것이 나오는 텅 빈 근원 |
| 성격 |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힘 |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음 |
| 왕필의 평가 | 가지·끝(末) | 뿌리·근본(本), 더 귀함 |
여기서 조심할 점이 있어요.
왕필이 '없음'을 귀하게 여겼다고 해서 '있음'을 하찮게 버리라고 한 건 아니에요.
가지가 있어야 나무가 살듯이, 있음도 없음에서 나온 소중한 결과거든요.
다만 어느 쪽이 더 근본이냐를 물으면 없음이라고 답한 것뿐이에요.
왕필이 스무 살 무렵, 관리였던 배휘(裴徽)와 '무(無)'를 두고 문답을 나눈 일화가 유명해요.
배휘가 "공자는 무를 말하지 않았는데 왜 노자는 늘 무를 말했느냐"고 묻자, 왕필은 이렇게 답했다고 해요.
"聖人體無,無又不可以訓,故不說也。老子是有者也,故恆言無所不足" — 성인(공자)은 무를 몸으로 체득했으나 무는 말로 가르칠 수 없어 말하지 않았고, 노자는 아직 유(有)의 차원에 있는 자이므로 늘 부족한 것(무)을 말했다는 뜻이에요.
(이 문답은 「왕필전」과 『세설신어』에서 문구가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니, 어느 한쪽만 원문이라고 못 박지는 않는 게 좋아요.)
놀라운 건 순서예요.
보통은 무를 열심히 말한 노자를 더 높일 것 같은데, 왕필은 무를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공자를 오히려 위에 뒀어요.
진짜로 무를 몸에 익힌 사람은 그걸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거죠.
이 대목이 왕필이 얼마나 '없음'을 근본으로 삼았는지 잘 보여 줘요.
다만 이런 '무를 체득한 성인'이 감정을 어떻게 대하느냐(성인유정)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라, 여기서는 무를 귀하게 본다는 큰 뼈대만 기억하면 돼요.
귀무론은 세 가지로 묶을 수 있어요.
첫째, 눈에 보이는 만물(有)의 뿌리는 아무 모양도 없는 무(無)라는 것.
둘째, 텅 비었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낳고 받쳐 주므로 그 '없음'이 가장 귀하다는 것.
셋째, 그렇다고 '있음'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무엇이 더 근본이냐를 따지면 없음이라고 답한다는 것이에요.
컵의 빈 곳이 컵을 쓸모 있게 하듯, 왕필은 보이지 않는 바탕에서 세상의 이치를 읽어 낸 셈이에요.
스물 남짓한 짧은 생을 살다 간 왕필이 남긴 이 생각은 이후 위진 현학이라는 흐름의 첫머리에 놓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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