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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타파스(tapas)는 자이나교의 고행이에요. 마하비라는 몸을 극한까지 절제하면 과거에 쌓아 둔 업이 열처럼 태워져 없어지고, 새 업을 더 짓지 않으면 업이 바닥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고 봤어요.
마하비라는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무렵 인도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는 스승이에요.
자이나교의 마지막 큰 스승으로 여겨지죠.
그가 걸은 길의 한가운데에 바로 '타파스(tapas)'가 있어요.
타파스라는 말은 원래 '뜨겁게 달구다', '열'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을 스스로 뜨겁게 단련하는 수행, 곧 고행이에요.
마하비라에게 이건 그냥 참기 대회가 아니었어요.
목적이 아주 분명했어요.
마음속에 눌어붙은 '업'을 태워 없애는 거였죠.
비유하자면 오래 안 쓴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기름때 같은 거예요.
살살 닦아선 안 지워지고, 불에 달구고 박박 문질러야 벗겨지죠.
마하비라는 우리 영혼에도 그런 때가 오래 쌓여 있다고 봤고, 그걸 벗겨 내는 불이 바로 타파스라고 했어요.
마하비라는 크샤트리아 왕족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스물여덟 살, 혹은 서른 살 무렵 재산과 가족을 다 버리고 집을 떠나 고행자가 됐어요.
왕자 자리를 내려놓고 맨몸으로 나선 셈이죠.
그 뒤 무려 12년 반 동안 강렬한 명상과 극단적인 고행을 이어 갔어요.
배고픔, 더위와 추위, 사람들의 조롱을 견디면서요.
그렇게 마흔세 살에 리주발리카 강가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케발라 즈냐나(Kevala Jnana)', 곧 모든 것을 아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져요.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예요.
편하게 지내다가 깨달은 게 아니라, 오랜 고행을 통과한 뒤에 깨달음이 왔다는 점이죠.
타파스는 그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였던 셈이에요.
불교 경전에도 마하비라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중아함경》의 니건경(尼乾經)은 그를 '니건다야제자(尼乾陀若提子)'라 부르며 그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해요.
옛날에 지은 업을 고행으로 소멸시키고, 새로운 업을 더하지 않으면, 업이 다해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거죠.
재미있는 점은, 이 경전이 그가 '업(業)'이라는 말 대신 '단다(丹荼)'라는 말을 썼다고 적은 거예요.
이름은 달라도 뜻은 통해요.
내가 한 행동이 마음에 남기는 흔적, 그게 쌓여 나를 묶어 두는 힘이라는 거죠.
그래서 마하비라의 셈법은 이렇게 정리돼요.
| 무엇을 | 어떻게 |
|---|---|
| 옛 업 | 고행(타파스)으로 태워 없앤다 |
| 새 업 | 절제해서 아예 짓지 않는다 |
| 결과 | 업이 바닥나면 영혼이 자유로워진다 |
들어오는 물을 잠그고, 이미 찬 물을 퍼내면 언젠가 통이 비죠.
마하비라의 타파스는 딱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일이었어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워요.
타파스가 그저 몸을 아프게 하는 극기 훈련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하지만 마하비라에게 고행은 절제하는 삶 전체와 이어져 있었어요.
그는 해탈을 위해 다섯 가지 큰 약속을 지키라고 했어요.
남을 해치지 않기(아힘사), 거짓말하지 않기, 훔치지 않기, 욕망을 절제하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예요.
이 약속들은 새 업을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고, 타파스는 이미 쌓인 업을 덜어 내는 노력이에요.
둘이 짝을 이루죠.
아힘사 같은 약속 하나하나는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게요.
타고르는 마하비라를 두고 "외적인 의식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어요.
타파스도 마찬가지예요.
겉으로 굶고 참는 흉내가 아니라, 안에 쌓인 걸 실제로 비워 내는 진짜 수행이어야 뜻이 있다는 거죠.
정리해 볼게요.
타파스는 마하비라가 걸은 고행의 길이고, 핵심은 '태우기'예요.
오래 쌓인 업을 고행으로 태워 없애고, 절제로 새 업을 막으면, 업이 바닥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이었죠.
그가 스물여덟 살 무렵 집을 떠나 12년 반을 견딘 것도, 마흔세 살에 얻은 깨달음도 모두 이 길 위에 있었어요.
눌어붙은 때를 불로 벗기고 물통을 비우는 그림 하나만 기억하면, 마하비라의 타파스가 왜 그토록 혹독했는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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