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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바닷가에 서서 파도를 본 적 있나요? 파도는 쉬지 않고 밀려와요. 하나가 부서지면 또 하나가 일어서고, 큰 놈 작은 놈 생김새도 제각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하죠. "저 파도가 수천 개구나."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좀 이상해요. 파도 하나를 손으로 떠서 "자, 이게 파도야" 하고 따로 떼어낼 수 있나요? 못 해요. 파도는 결국 바닷물이 잠깐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는 모습일 뿐이거든요. 눈에는 수천 개로 보여도, 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 하나예요.
지금으로부터 800년쯤 전에, 이 비슷한 생각을 평생 파고든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이븐 아라비예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이븐 아라비는 1165년, 지금의 스페인 남쪽 무르시아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그때 그 땅은 이슬람 문화가 활짝 꽃핀 곳이라, 책과 학자가 넘쳐났죠. 그는 열 몇 살 무렵부터 깊은 명상에 빠졌고, 신을 머리로 따지기보다 가슴으로 직접 느끼고 싶어 했어요. 이런 사람들을 수피라고 불러요. 이슬람 안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 신을 만나려던 이들이죠.
그는 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스페인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를 지나 성지 메카까지, 걸어서 몇 달이 걸리는 먼 길을 오갔어요. 가는 곳마다 쉬지 않고 글을 썼는데, 평생 남긴 책이 수백 권에 이른다고 전해져요. 그중 한 권은 수천 쪽에 달했다고 하니, 웬만한 백과사전 여러 질에 맞먹는 분량이에요. 사람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 불렀고, 그는 1240년 지금의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어요. 그의 무덤은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죠.
이븐 아라비 하면 빠지지 않는 말이 와흐다트 알 우주드예요. 발음도 어렵고 낯설죠? 천천히 풀면 "존재는 하나다"라는 뜻이에요. 우리말로는 존재 단일성이라고 옮겨요. 재미있는 건, 이 말 자체는 그가 직접 지은 게 아니라 후대 제자들이 그의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한 표현이라는 점이에요.
다시 바다로 돌아가 볼게요. 이븐 아라비는 이렇게 봤어요. 진짜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신, 딱 하나뿐이에요. 신이 바다라면 세상 만물, 그러니까 나무도 돌도 너도 나도 그 바다 위에 잠깐 솟은 파도예요. 파도가 바닷물 없이 혼자 존재할 수 없듯이, 세상 어떤 것도 신과 똑 떨어져 혼자 힘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눈에는 다들 제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뿌리를 캐 보면 전부 한 존재에서 흘러나온 모습이라는 이야기예요.
여기서 많은 사람이 오해해요. "그럼 나는 헛것이고 가짜라는 거야?" 아니에요. 다시 파도를 떠올려 보세요. 파도는 분명히 거기 있어요. 발을 적시고, 애써 쌓은 모래성을 무너뜨리기도 하죠. 절대 가짜가 아니에요. 다만 바다와 따로 떨어진 '독립된 물건'이 아닐 뿐이에요.
이븐 아라비가 하려던 말도 똑같아요. 너도 나도 진짜로 여기 있어요. 하지만 우리 각자가 세상의 중심인 양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더 큰 하나에 이어져 있다는 거죠. 거울 여러 개에 나뉘어 비친 햇빛을 떠올려도 좋아요. 거울마다 빛 모양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지만, 그 빛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 하나에서 온 거잖아요. 우리도 그렇다는 거예요.
이 생각은 그저 머리로 굴린 말장난이 아니었어요. 만약 세상 모든 것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면, 내 앞의 낯선 사람도, 길가에 핀 풀 한 포기도 사실은 나와 깊이 이어진 셈이에요.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누군가를 함부로 미워하거나 짓밟기가 어려워지죠. 수피들이 유난히 사랑과 너그러움을 강조한 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었어요.
물론 이 주장은 거센 논쟁도 불렀어요. "그러면 세상과 신을 똑같다고 보는 거냐"며 반대한 학자도 적지 않았죠. 신과 세상이 하나로 녹아 버리면 신이 너무 가벼워진다고 걱정한 거예요. 그런 논쟁 속에서도 이븐 아라비의 와흐다트는 이슬람 신비주의 철학의 한 봉우리로 우뚝 남아,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고 또 풀이되고 있어요.
파도는 수천 개처럼 보여도 물은 바다 하나예요. 이븐 아라비는 세상 만물을 바로 그 파도처럼 봤어요. 우리는 분명 여기 진짜로 있지만, 저마다 동떨어진 외딴섬이 아니라 더 큰 하나에 이어져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와흐다트 알 우주드예요. 다음에 바닷가에 서면 출렁이는 파도 말고 그 아래 묵직한 바다를 한 번 떠올려 보세요. 800년 전 한 사람이 평생 바라보던 풍경이, 어쩌면 거기 그대로 있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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