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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엉엉 울게 되는 영화를 본 적 있죠. 주인공이 끝내 세상을 떠나고,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화면이 어두워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요. 옆자리 사람도 코를 훌쩍이고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그다음이에요. 극장 불이 환하게 켜지고 밖으로 걸어 나오면, 마음이 무겁기는커녕 이상하게 개운하고 후련하거든요. 분명 슬픈 이야기를 두 시간이나 봤는데 왜 기분이 더 좋아질까요. 슬픔을 봤으면 슬퍼야 정상 아닌가요. 놀랍게도 천 년 전 인도에도 바로 이 질문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평생을 파고든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아비나바굽타예요. 발음이 낯설죠. 950년 무렵부터 1016년 무렵까지,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고려 초기쯤에 인도 북쪽 카슈미르 지방에서 살았어요. 그는 한 우물만 판 사람이 아니었어요. 시바 신을 마음 깊은 곳에서 만나려는 명상 전통인 '카슈미르 샤이바 철학'에도 깊었고, 동시에 연극과 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따지는 '인도 미학'에도 밝았죠. 명상하는 수행자이면서 예술을 분석하는 평론가였던 셈이에요. 그가 주석을 단 책 중에는 인도 연극의 아주 오래된 교본인 '나탸샤스트라'도 있는데, 거기 붙인 풀이가 지금까지도 라사 이론의 결정판으로 꼽혀요. 그리고 그가 평생 매달린 열쇠말이 바로 '라사'였어요.

라사라는 말은 원래 '맛', 또는 과일을 짜낸 '즙'이라는 뜻이에요. 잘 익은 망고를 한 입 베어 물 때 입안 가득 퍼지는 그 달콤한 맛, 인도 사람들이 라사라고 부르던 게 바로 그거였어요. 아비나바굽타는 좋은 연극이나 시도 이 망고와 똑같다고 봤어요. 우리가 이야기에 빠져들며 가슴에서 느끼는 슬픔, 사랑, 두려움 같은 감정의 풍미, 그게 바로 예술이 주는 라사거든요. 음식의 맛은 혀로 보고, 예술의 맛은 마음으로 본다는 거죠. 인도 사람들은 이 마음의 맛을 여덟 가지로 나눴어요. 사랑, 웃음, 슬픔, 분노, 용맹, 무서움, 역겨움, 놀라움. 영화 한 편 안에도 이 맛들이 요리처럼 섞여 들어가 있어요.

여기서 진짜 궁금한 대목이 나와요. 실제로 내가 아끼는 사람을 잃으면 그 슬픔은 나를 칼처럼 찔러요.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가죠. 그런데 똑같은 이별을 영화로 보며 흘리는 눈물은 왜 후련할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부러 돈을 내고 무서운 공포 영화를 보거나 유령의 집에 들어가잖아요. 진짜 위험이라면 질색하면서, 이야기 속 무서움은 오히려 즐기죠. 아비나바굽타의 답은 이래요. 극장에 앉은 나는 사실 '내 슬픔'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저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인지, 나와 무슨 관계인지 따지지 않고, 그냥 슬픔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맛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내 것'이라는 딱지가 떨어져 나간 감정을 그는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 된 감정'이라고 설명했어요. 내 이익도 손해도 걸려 있지 않으니까, 슬픔마저 맑고 깨끗한 맛으로 바뀌는 거죠. 현실의 슬픔이 쓴 약이라면, 예술의 슬픔은 잘 우려낸 차 같아요.

아비나바굽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서부터예요. 인도 철학에는 '해탈'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있어요. 모든 괴로움과 욕심에서 완전히 풀려나 한없이 자유롭고 평온해지는 상태죠. 평소 우리는 '나, 내 것, 내 걱정'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살아요. 이게 잘될까,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늘 마음이 바쁘죠. 그런데 예술에 푹 빠져드는 그 짧은 순간, 신기하게도 이 울타리가 스르르 사라져요. 잠깐 '나'를 까맣게 잊고 감정의 맛에 온전히 녹아드는 거예요. 아비나바굽타는 바로 그 순간의 기쁨이 해탈의 기쁨과 형제처럼 닮았다고 봤어요. 영화가 끝나고 밀려오는 후련함은, 잠깐이나마 '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었던 거죠. 물론 그 자유는 영화가 끝나면 사라지는 잠깐짜리라, 영영 자유로운 진짜 해탈과는 다르다고 그도 분명히 선을 그었어요.

그래서 그는 앞서 말한 여덟 가지 맛에 아홉 번째를 더 보탰어요. '샨타', 곧 고요함의 맛이에요. 들뜬 사랑도, 활활 타는 분노도, 짜릿한 무서움도 다 가라앉고 난 뒤에 남는,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이죠. 다른 여덟 맛이 우리를 잠깐 나에게서 벗어나게 한다면, 이 고요의 맛은 해탈의 문턱까지 가장 가까이 데려다준다고 그는 봤어요. 그래서 아비나바굽타에게 예술은 그냥 심심풀이 오락이 아니었어요. 잘 만든 시 한 편, 연극 한 편이 마음을 닦고 자유에 다가가는 진지한 길이 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망고의 단맛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마음의 자유까지 이어진 셈이죠.

슬픈 영화를 보고 후련해지는 건 우리 마음이 어딘가 이상해서가 아니에요. 아비나바굽타는 그 순간 우리가 '내 슬픔'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를 맛본다고 했어요. '나'라는 좁은 울타리가 잠시 사라지는 그 기쁨이 해탈의 기쁨과 닮았고, 그래서 예술은 우리가 짧게나마 맛보는 자유라는 거죠. 가장 고요한 샨타의 맛은 그 자유에 가장 가깝고요. 다음에 영화관에서 눈물이 핑 돌 때, 그 후련함의 정체를 천 년 전 카슈미르의 한 철학자가 이미 곰곰이 설명해 두었다는 걸 떠올려 봐도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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