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픽테토스.
그리스어로 '획득된 자'라는 뜻이다.
이름부터가 이미 그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비서관이었던 에파프로디토스의 소유물로 로마에 왔다.
소유물이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당시 법률이 그를 그렇게 규정했다고 말하면 된다.
오리게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주인 혹은 감독관이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비틀기 시작했다.
에픽테토스는 조용히 말했다.
"부러질 것입니다."
경고였지만,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의 진술이었다.
비틀기는 계속되었고, 다리는 결국 부러졌다.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분노도 없었고, 비명도 없었다는 기록이다.
이 일화가 후대에 그토록 오래 회자된 이유는 그 말 자체의 평온함 때문이다.
다리가 부러지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 타인의 행동, 자신의 몸 — 과 통제할 수 있는 것 — 자신의 반응 — 사이의 경계를 잃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용기인지, 체념인지,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는 당신이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의 철학 전체의 축소판이 되었고, 2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가 되었다.
에파프로디토스는 독특한 주인이었다.
그는 에픽테토스를 당대 로마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 무소니우스 루푸스에게 보내 철학을 배우게 했다.
무소니우스의 강의실을 상상해보면 이렇다.
한쪽에는 하얀 토가를 걸친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 계급 자제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노예 신분의 소년이 앉아 있다.
당시 로마에서 이것은 작은 균열이었다.
신분이 지식에 접근하는 권리를 결정하는 세계에서, 무소니우스는 그 경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무소니우스 자신도 황제 네로에게 추방당한 경험이 있었고, 철학이란 편안한 자리에 앉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픽테토스는 스승에게서 한 가지 구분법을 배웠다.
세상의 모든 것은 두 종류로 나뉜다.
우리에게 달린 것과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
판단, 욕구, 의지 — 이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몸, 명성, 재산, 타인의 행동 — 이것들은 달려 있지 않다.
단순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구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방식이 통째로 바뀐다.
에픽테토스는 이 구분을 스승에게서 받아 자신의 철학 전체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철학을 실험하기에 그의 삶은 — 본인이 원하든 아니든 — 이미 충분한 실험실이었다.
서기 89년경,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에서 모든 철학자를 추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철학자들이 너무 많은 질문을 했다.
이미 해방노예 신분이 된 에픽테토스도 로마를 떠나야 했다.
다리를 절며 그는 그리스 북서부의 작은 도시 니코폴리스로 향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악티움 해전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도시, 제국의 기억이 배어 있는 그곳에 그는 자신의 학교를 열었다.
추방은 재앙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에픽테토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공간을 주었다.
주인의 집도 아니고, 황제의 도시도 아닌 —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장소.
니코폴리스 학교는 빠르게 유명해졌다.
로마 전역에서 학생들이 찾아왔다.
원로원 의원의 아들들, 야망 있는 청년들, 그리고 그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사람들이.
에픽테토스는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두려움은 실제로 당신에게 달린 문제인가, 아닌가.
이 질문들은 철학 시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질문이었고, 에픽테토스는 그 답을 강의실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먼저 배웠다.
에픽테토스는 단 한 줄도 직접 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처럼.
붓다처럼.
예수처럼.
말로만 가르치고 사라진 사람들의 계보에 그도 속해 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다행히 꼼꼼한 제자가 있었다.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는 훗날 역사가가 된 인물이다.
그는 에픽테토스의 강의를 들으며 스승의 말을 그리스어 구어체 그대로 받아 적었다.
정리된 문어체가 아니라, 실제로 말해진 방식으로.
아리아노스는 이렇게 써두었다.
'나는 그의 말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려 했다.'
그 결과물이 《담화록(Discourses)》이다.
원래 8권이었으나 4권만 전해진다.
그리고 아리아노스는 핵심만 추려 짧은 요약본도 만들었는데, 그것이 《엥케이리디온(Enchiridion)》이다.
'손에 쥐는 것'이라는 뜻이다.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담화록》을 읽으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2천 년 전의 텍스트인데, 에픽테토스가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들린다.
그가 학생을 다그치는 장면, 반론에 답하는 장면, 농담처럼 말하다가 갑자기 날카로워지는 장면.
그 살아 있음은 아리아노스가 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철학서가 아니라, 실제 강의의 공기를 그대로 담은 기록.
그 선택 덕분에 에픽테토스의 목소리는 지금도 식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간.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1권 첫 페이지, 감사의 목록.
그는 자신의 스승들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스승에게 이렇게 감사했다.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을 접하게 해준 것에 대해.
이 일기는 황제의 공식 문서가 아니었다.
전장의 천막에서, 밤에 혼자, 자신을 향해 쓴 글이었다.
출판할 생각이 없었던 글.
그래서 오히려 진짜였다.
황제가 전쟁터에서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는 말들 — 통제할 수 없는 것에 흔들리지 말 것,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을 할 것 — 그것들은 에픽테토스에게서 온 것이었다.
노예 출신의 철학자가 황제의 내면을 구성하는 뼈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사회적 위치가 사상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황제에게 읽힐 것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아마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황제에게도, 노예에게도,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무엇이 당신에게 달려 있는가.
그것에 집중하라.
에픽테토스 사후에도 《엥케이리디온》은 계속 필사되었다.
수도원에서, 군영에서.
손에 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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