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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27년, 그 책의 첫 페이지에는 스승의 이름이 있었다.
1941년, 같은 페이지는 비어 있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은 20세기 철학의 판도를 바꾼 책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첫 장에는 스승 에드문트 후설에 대한 헌정사가 적혀 있었다.
후설은 단순한 스승이 아니었다.
하이데거가 철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직접 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존재와 시간』 자체가 후설의 연구 방법론 위에서 탄생한 책이다.
그런데 1941년, 나치 정권 치하에서 개정판이 나오면서 헌정사가 사라졌다.
후설은 유대인이었고, 이미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
하이데거는 총장 재임 시절 후설이 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졸업논문 지도교수의 이름을 감사의 글에서 지우는 것과 같다.
그것도 교수가 해고당한 직후에.
자신의 철학적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해준 사람의 이름을, 그가 가장 취약해진 순간에 지운 것이다.

군중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친 철학자가 1933년 5월 1일, 나치당 입당 서류에 서명했다.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본래적 실존'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 유행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마라. 네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라.
군중 속에 녹아들어 '그냥 다 그렇게 사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삶을 하이데거는 가장 경계해야 할 삶으로 봤다.
그런데 그 하이데거가 1933년, 나치당에 자발적으로 입당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하면서 행한 취임 연설에서는 독일 대학의 사명을 나치 운동과 직접 연결시켰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마라'고 책을 쓴 사람이 시대의 가장 거대한 군중운동에 편승한 것이다.
철학 강의실에서 그토록 경계하라고 가르친 바로 그 삶을, 강의실 밖에서 직접 살고 있었다.

시인은 산장까지 올라갔다.
부모를 죽인 체제에 동조했던 철학자의 입에서 단 한 마디를 듣기 위해.
1967년, 파울 첼란이 하이데거의 산장을 찾아왔다.
첼란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그의 부모는 나치 수용소에서 죽었다.
하이데거의 토트나우베르크 산장은 독일 블랙포레스트 산속에 있는 오두막이다.
하이데거가 세상과 단절하고 사유에 잠기던 장소였다.
첼란은 그곳의 방명록에 글을 남기며 기다렸다. 하이데거가 "한 마디 말"을 건네주기를.
사과든, 해명이든, 아니면 그냥 "미안하다"는 말이든.
하이데거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첼란은 이 만남을 시 「토트나우베르크」에 담았다.
시 속에서 그는 방명록에 "희망을 적었다"고 썼다. 철학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을 담은 말이 오기를 바라는 희망.
그 희망이 이루어졌는지는 시에서 끝내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를 평생 탐구한 철학자가, 가장 존재론적인 순간에 침묵을 선택했다.
한 사람이 자신 앞에 직접 서서 말을 기다리는 그 순간에.

하이데거는 자신의 변명이 공개될 시점까지 설계했다.
아무도 반론할 수 없는 때, 즉 자기가 죽은 뒤.
1966년, 하이데거는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과 긴 인터뷰를 진행했다.
『슈피겔』은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중 하나다.
조건이 있었다. "내가 죽은 뒤에 공개하라."
1976년, 하이데거가 세상을 떠났다.
인터뷰가 공개됐다.
거기서 그는 나치 가담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학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였다."
SNS에 해명 글을 올리면서 댓글을 막아두는 것과 비슷하다.
반론의 여지를 스스로 차단한 것이다.
그런데 2014년, 예상치 못한 문서가 공개됐다.
'검은 노트'라고 불리는 하이데거의 사적 철학 일지다.
그가 1930년대부터 직접 손으로 써내려간 기록인데, 그 안에 반유대주의적 구절이 발견됐다.
공개적인 발언이 아니었다.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혼자 쓴 메모였다.
그 메모가 인터뷰 속 변명을 조용히 뒤집었다.
하이데거는 평생 "진정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의 삶 전체로 그 반대의 예시를 남겼다.
그가 가르친 철학과 그가 산 삶 사이의 거리를, 독자는 지금도 각자 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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