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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본관 복도에는 20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죽어 있다.
제러미 벤담은 1832년 세상을 떠나면서 특이한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시신을 해부학 강의에 기증하고, 뼈와 옷으로 '오토아이콘(auto-icon)'을 만들어 보존하라는 것이었다.
오토아이콘이란 그가 직접 만든 단어로, '자기 자신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 결과물이 지금도 UCL(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본관 복도의 유리 캐비닛 안에 앉아 있다.
밀랍 두상에 챙 넓은 모자, 그가 입던 코트를 그대로 걸쳤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다.
UCL 이사회 회의록에 그의 이름이 이렇게 기록된 적이 있다.
"출석하였으나 투표하지 않음(present but not voting)."
화상회의에 카메라만 켜놓고 자리를 비운 적 있는가?
벤담은 그걸 200년째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체 출석부'의 주인공이 바로, 행복을 수학 공식으로 만들려 했던 사람이다.


행복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매일 그걸 하고 있다.
앱스토어에서 별점 4.5짜리와 4.2짜리 앱 중 어느 것을 다운받을지 고민할 때, 우리는 이미 벤담식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7가지 기준으로 측정하는 '행복 계산법(felicific calculus)'을 고안했다.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파급력, 순수성, 범위.
쉽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다. "이 기쁨은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오래가는가? 몇 명에게 퍼지는가?"
이 계산법은 그의 주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론(1789)』에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결론이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핵심 원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공리주의란 한마디로, 더 많은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선택이 곧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당대 사람들은 비웃었다.
행복이 어떻게 숫자가 되냐고.
그런데 오늘날 GDP, 삶의 질 지수, 고객 만족도 점수는 모두 이 발상의 후손이다.
행복을 계량화하려 한 '괴짜'가 현대 정책과 경영의 기본 문법을 만든 셈이다.
비웃음이 200년 뒤 표준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유를 가장 사랑한 철학자가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감시 장치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하자 무너져 내렸다.
1791년, 벤담은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 감옥을 설계했다.
파놉티콘은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온 이름이다.
구조는 단순하다. 원형 건물 중앙에 감시탑을 세우고, 수감자 방을 그 둘레에 배치한다.
감시자는 모든 방을 볼 수 있지만, 수감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그의 의도는 '처벌'이 아닌 '교화'였다.
"언제 감시받는지 모른다면,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
감시자가 항상 거기 없어도,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벤담은 이 프로젝트에 전 재산의 상당 부분을 쏟아부었다.
20년 넘게 영국 정부를 설득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 좌절은 그의 인생 최대의 상처였다.
그런데 200년 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이 설계도를 꺼냈다.
푸코의 해석은 달랐다. 파놉티콘은 '교화 시설'이 아니라 권력이 인간을 통제하는 방식 그 자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 위치 추적, 사무실 CCTV, SNS 알고리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행동을 바꾼다.
그 구조의 설계도는 18세기에 이미 그려져 있었다.


1785년, 한 남자가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라고 썼다.
그리고 그 원고를 서랍에 넣었다.
세상이 준비될 때까지 200년이 걸렸다.
벤담은 동성애 비범죄화뿐 아니라 동물 권리 보호, 여성 참정권, 사형 폐지,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당시 기준으로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썼다.
사후에 발견된 미발표 원고가 6만 쪽이 넘었다.
UCL의 '벤담 프로젝트'는 지금도 이 원고를 정리하고 출판하는 중이다.
그의 주장은 하나같이 100년에서 200년 뒤에야 상식이 되었다.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 가장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유로 침묵해야 했던 것이다.
그 침묵이 6만 쪽으로 쌓였다.
회의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경험이 있는가.
벤담은 그걸 평생 했다.
그리고 서랍 속에 넣어둔 아이디어가, 그가 죽고 나서야, 세상을 바꿨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서랍 속에도 200년 뒤의 상식이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이 과연 몇 쪽을 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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