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30년 9월 8일, 69세의 힐베르트는 라디오 앞에 서서 인류에게 약속했다.
모든 수학 문제는 풀 수 있다고.
그런데 바로 전날, 같은 건물 다른 방에서 그 약속이 영원히 지켜질 수 없다는 증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회사에서 10년짜리 프로젝트 완성 발표회를 열었는데, 옆 회의실에서 신입사원이 그 프로젝트의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상황이다.
다비트 힐베르트의 1930년 쾨니히스베르크 학회가 정확히 그랬다.
힐베르트의 은퇴 기념 강연 전날, 같은 학회의 한 분과 세션에서 25세 청년 쿠르트 괴델이 조용히 발표를 마쳤다.
그가 내놓은 것은 불완전성 정리였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수학 체계도 자기 자신이 모순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다."
힐베르트가 평생을 바쳐 세운 꿈은 '수학을 완전히 기초부터 쌓는 것'이었다.
모든 수학 문제에 답이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풀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괴델은 수학의 논리 안에서 수학 자체의 한계를 증명해 버렸다.
그다음 날 힐베르트는 라디오에서 선언했다.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전날 다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학에도 '할 일 목록'이 있다.
그리고 그 목록을 쓴 사람은 단 한 명이다.
1900년, 힐베르트는 파리에서 열린 국제수학자대회에서 23개의 미해결 수학 문제를 발표했다.
이 목록은 정부가 만든 것도 아니고 위원회가 투표한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지적 권위만으로 한 세기 수학의 방향을 사실상 결정해 버렸다.
직장 선배가 화이트보드에 적은 해야 할 일 목록이 부서 전체의 연간 계획이 되어버린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100년짜리였다면?
이 목록에서 문제를 푼 수학자들이 필즈상을 받았다.
필즈상은 수학계의 노벨상이다.
4년에 한 번, 40세 미만 수학자에게만 주어지는, 수학자라면 평생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상.
그리고 2000년,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힐베르트의 목록을 본떠 밀레니엄 문제 7개를 선정했다.
각 문제당 상금은 100만 달러.
힐베르트가 죽고 57년이 지난 뒤에도, 그가 설계한 지적 지형 위에서 수학자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1933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과의 교수 명단에서 이름이 하나씩 지워졌다.
사유는 학문적 무능이 아니라 혈통이었다.
힐베르트가 이끈 괴팅겐 대학교 수학과는 20세기 초 세계 수학의 수도였다.
최초의 여성 수학 교수 중 한 명인 에미 뇌터, 응용수학의 선구자 리하르트 쿠란트, 수학과 물리학을 넘나들었던 헤르만 바일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세계 각지의 수학자들이 괴팅겐으로 유학을 왔고, 이 도시는 수학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 해 나치 정권이 들어섰다.
유대인과 정치적으로 불온한 교수들을 대학에서 추방하는 법령이 발효됐다.
한 학기도 안 되어 괴팅겐 수학과는 텅 비었다.
그 직후 나치 교육부 장관이 힐베르트 옆에 앉아 물었다.
"유대인 영향에서 해방된 괴팅겐 수학은 어떻습니까?"
힐베르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괴팅겐에 수학이요? 더 이상 없습니다."
수학은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학문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한 정권의 결정 하나가, 한 세대가 쌓아올린 지적 생태계를 한 학기 만에 소멸시켰다.
최고의 팀이 경영진의 한 번의 결정으로 해체되는 것을 본 적 있다면, 그 공허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팀 하나가 아니라 수십 년간 인류가 쌓은 집단 지성 전체였다.

한 시대의 수학을 설계한 사람의 장례식에 열두 명이 왔다.
전쟁 중이었고, 그가 곁에 두었던 사람들은 이미 대서양 건너편에 있었다.
1943년 2월 14일, 힐베르트는 괴팅겐에서 숨을 거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동료들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남은 사람은 열두 명이었다.
SNS 팔로워 수만 명인 사람의 실제 생일 파티에 아무도 오지 않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영향력과 관계는 전혀 다른 것이다.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 전체를 설계했지만, 마지막 순간 곁에 남은 사람은 열두 명이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그가 남긴 말이 새겨졌다.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문장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어떤 수학 체계도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힐베르트가 묘비에 새긴 바로 그 선언은, 수학적으로 이미 반박된 명제다.
하지만 그 묘비는 여전히 괴팅겐 공동묘지에 서 있다.
틀린 선언이 새겨진 돌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그 문장 앞에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낙관주의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었던 걸까.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