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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이탈리아 반도 서쪽 해안, 티레니아 해를 바라보는 절벽 위에 엘레아라는 도시가 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세운 식민도시였다.
기원전 515년 무렵, 파르메니데스는 바로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학자이기 전에 도시의 법을 만든 사람이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엘레아에 법률을 제정한 뒤 시민들은 해마다 그 법에 충성을 서약했다.
매년 반복되는 그 서약 속에서 도시는 질서를 유지했다.
법을 만든다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확신을 필요로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변해도 되고 무엇이 변하면 안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평생 그 질문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허상이라는 것.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이 생각을 논문으로 쓰지 않았다.
서사시로 썼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쓴 것처럼, 그는 헥사메트로스 운율로 자신의 철학을 노래했다.
제목은 『자연에 관하여』.
그리고 그 첫머리, 서곡에서 그는 독자를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으로 데려간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마차에 타고 있다.
불멸의 암말들이 마차를 끌고 달린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밤과 낮이 갈리는 경계, 거대한 문 앞이다.
정의의 여신이 그 문을 지키고 있다.
태양의 딸들이 앞에서 설득하자 여신은 문을 열어준다.
파르메니데스는 문 너머로 들어선다.
여신은 그를 맞이하며 두 갈래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진리의 길.
다른 하나는 의견의 길.
진리의 길은 좁고 험하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통한다.
의견의 길은 넓고 익숙하지만 그곳에서 인간들은 밤과 낮이 번갈아 오고, 사물이 생겨났다 사라진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이 서곡은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신적 계시, 즉 진리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는 다음 장면에서 드러난다.

여신이 전하는 진리의 첫 문장은 이렇다.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 발짝 더 따라가보자.
무언가가 생겨나려면, 그것은 이전에 없었다가 있게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없음'에서 '있음'으로 건너와야 한다.
그런데 여신의 논리대로라면, '없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없음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없음에서 생겨남'도 불가능하다.
생성은 없다.
같은 논리로 소멸도 없다.
'있음'이 '없음'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없음이란 애초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움직임은 어떤가.
무언가가 움직이려면 그것이 이동해 들어갈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빈 공간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없음'은 없으므로, 빈 공간도 없다.
따라서 움직임도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현존하는 단편 8번에서, 여신은 이 연역을 단계적으로 밀어붙인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았고, 소멸하지 않으며, 분할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완전한 구체처럼, 중심에서 사방으로 균등하게 뻗어 어디에도 더 있거나 덜 있는 곳이 없다.
이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로 기록된 체계적 논리 증명이다.
직관도 신화도 아닌, 순수한 연역.
전제에서 결론까지 빈틈 없이 이어지는 논리의 사슬.
그리고 그 결론이 가리키는 것은 충격적이다.
우리가 매일 보는 세상,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그 세상은 진리가 아니다.
감각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
실재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주장을 들은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많은 이들이 비웃었을 것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움직임이 없다고?
발 앞에서 강물이 흐르는데 변화가 없다고?
그때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이 나섰다.
제논의 전략은 정면 반박이 아니었다.
그는 스승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그들보다 더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좋다. 운동과 다수성이 실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가 제시한 것이 그 유명한 역설들이다.
빠른 영웅 아킬레우스가 느린 거북이를 쫓는다.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보다 조금 앞에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이미 조금 더 앞에 가 있다.
다시 그 자리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또 조금 더 앞에 있다.
이 간격은 무한히 줄어들지만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
날아가는 화살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을 포착해 정지시키면, 화살은 특정 위치에 있다.
또 다른 순간에도 화살은 특정 위치에 있다.
화살은 매 순간 정지해 있는 셈이다.
정지의 연속이 어떻게 운동이 될 수 있는가.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는 제논이 이 목적을 직접 밝히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글은 스승의 논제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며, 다수성을 가정하면 단일성을 가정했을 때 못지않은 우스운 결론이 따라온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제논의 역설들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철학과 수학에서 생생하게 논의된다.
무한급수, 극한의 개념, 연속의 문제.
스승을 방어하려고 만든 논증이 수학사의 한 장을 열었다.

기원전 450년 무렵, 아테나이에서 한 만남이 있었다.
플라톤이 기록한 그 장면은 이렇다.
65세의 파르메니데스가 아테나이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 스무 살 안팎의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데아론을 펼쳤다.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그 모두가 공유하는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
구체적인 사물들은 이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그 성질을 갖는다.
파르메니데스는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과 사물들을 포괄하는 또 다른 이데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위에 또 다른 이데아, 또 그 위에 또 다른 이데아.
이 사슬은 끝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당황했다.
플라톤이 기록한 이 대화에서 젊은 소크라테스는 답을 찾지 못한다.
이 만남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적이다.
65세의 파르메니데스와 스무 살의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같은 자리에 앉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 장면을 이렇게 썼다는 사실 자체가 무언가를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를 만인 위에 세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로 파르메니데스를 선택했다.
철학의 역사가 막 시작되려던 그 시절, 엘레아에서 온 노인은 이미 모두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그 단 두 마디에서 출발한 논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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