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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리드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마음속 '관념'이라는 복사본을 먼저 본다는 가정을 걸고넘어졌어요. 그 중간 매개를 일단 인정하면 바깥 세계를 확인할 길이 막혀, 결국 흄의 회의주의로 굴러떨어진다는 거죠.
스코틀랜드 철학자 토머스 리드는 1710년에 태어나 1796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다시 의심하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흄의 『인간 본성론』(1739)이었죠.
리드는 『An Inquiry into the Human Mind』(1764) 헌사에서 이렇게 적어요.
"I never thought of calling in question the principles commonly received with regard to the human understanding, until the Treatise of Human Nature was published in the year 1739."
1739년 그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인식의 원리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그가 뒤늦게 의심한 그 원리가 바로 '관념설(the Way of Ideas)'이에요.
텔레비전으로 축구 중계를 본다고 해볼게요.
우리는 경기장 잔디를 직접 밟지 못하고, 화면에 뜬 영상만 봅니다.
관념설은 우리 마음도 늘 이렇다고 말해요.
베개를 만질 때도 베개 자체가 아니라 마음속에 뜬 '관념(idea)'이라는 화면을 볼 뿐이라는 거죠.
데카르트, 로크, 버클리, 흄이 모두 이 그림을 공유했습니다.
참고로 '관념설'이라는 이름 자체는 리드가 지어낸 게 아니라, 로크를 비판한 스틸링플릿 등이 1697년 무렵 먼저 쓴 말을 리드가 빌려 널리 퍼뜨린 거예요.
리드가 보기에 이 화면 그림에는 처음부터 회의주의가 심어져 있었어요.
화면만 볼 수 있다면, 화면 바깥에 진짜 경기장이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까요?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로크의 전제를 밀고 나가면 버클리가 "물질세계 같은 건 없다"고 말하게 되고, 버클리를 더 밀면 흄이 "외부 세계는 물론 나 자신도, 원인과 결과도 확실하지 않다"는 전면적 회의로 치닫습니다.
리드의 전략은 영리했어요.
흄을 억지로 반박하기보다, "이 결론이 싫다면 세 사람이 함께 깔고 있던 전제를 다시 보라"고 부담을 되돌린 거예요.
그 공통 전제란 '관념이 지각과 사고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대상'이라는 가정이죠.
리드는 이 가정을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관념적 체계(the ideal system)'라 부르며, 여기에 도전하는 '결정적 실험(experimentum crucis)'을 지지자들에게 제안했어요.
리드의 대표 논증은 '지성화 문제'예요.
외국인 친구와 대화하려고 통역사를 한 명 세웠다고 해봐요.
그런데 그 통역사가 나도 모르는 제3의 언어를 쓴다면?
통역사를 이해하려고 또 다른 통역사가 필요하고, 그 통역사를 위해 또 통역사가… 끝이 없죠.
마음과 사물 사이에 '관념'을 하나 끼워 넣는 것도 똑같아요.
그 관념 자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문제가 그대로 남아, 해결은 안 되고 한 걸음 뒤로 밀릴 뿐이에요.
관념이 사물을 대신하는 상징이고, 지성이 그 상징을 책 읽듯 읽는다는 생각에 리드는 이렇게 되받아칩니다.
"This view does not solve the problem; for who will interpret this book for us?"
이 견해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 대체 이 책을 누가 우리 대신 해석해 주느냐는 거죠.
지각이 오직 자기 관념만 상대한다면, 그 지각은 자기 너머의 무엇에 관한 앎이 될 수 없어요.
밖을 향하는 힘, 곧 의도성이 사라지는 겁니다.
리드는 물리학자 뉴턴의 연구 규칙을 끌어와요.
그는 뉴턴 제1규칙을 이렇게 옮깁니다.
"No more causes... ought to be admitted, but such as are both true, and are sufficient for explaining their appearances."
참이면서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인 외에는 함부로 인정하지 말라는 규칙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평합니다.
"This is a golden rule."
이것은 황금률이며, 철학에서 견실한 것과 공허한 것을 가려내는 참된 시험이라는 거죠.
리드가 보기에 관념설 지지자들은 이 황금률을 어겼어요.
'관념'이라는 정신적 매개물이 실제로 있다는 증거는 대지 못한 채, 그저 있다고 가정해 버렸으니까요.
근거 없는 가설을 슬쩍 끼워 넣은 셈이죠.
흄은 탁자가 멀어지면 겉보기 크기가 줄어드니 우리가 보는 건 실물이 아니라 관념이라고 했어요.
리드는 '가시적 크기(visible figure)'와 '촉각적 크기(tangible figure)'를 나눠 반박합니다.
눈에 보이는 크기가 거리에 따라 줄어드는 건 착시가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정상 현상이고, 실물 크기와 겉보기 크기를 뒤섞은 데서 온 혼동이라는 거예요.
그의 대안은 감각과 지각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해요.
감각은 대상 없는 주관적 느낌이지만, 추론 없이 곧바로 외부 대상을 '암시(suggest)'하는 자연적 기호로 작동한다는 거죠.
마치 연기를 보면 곧장 불을 떠올리듯요.
다만 리드가 관념설을 완전히 논파했다고 자평한 건 아니에요.
그의 '가시적 크기'가 오히려 매개물을 다시 끌어들인 것 아니냐는 학계 논쟁(Van Cleve, Yaffe)도 남아 있고요.
리드의 관념설 비판은 이렇게 정리돼요.
첫째, 마음과 사물 사이에 '관념'이라는 화면을 끼우면 바깥 세계를 확인할 길이 막혀 회의주의로 끝나요.
둘째, 매개물을 하나 더 넣는 건 통역사를 무한히 세우는 것과 같아서 헛수고예요.
셋째, 근거 없는 관념 가설은 뉴턴의 황금률을 어겨요.
리드는 흄을 완벽히 꺾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다만 "결론이 싫으면 전제를 다시 보라"며 입증의 짐을 되돌렸어요.
이 상식의 태도는 훗날 무어와 오스틴에게로 이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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