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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슬로터다이크는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로 바꿔 물어요. 사람은 혼자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만든 둥근 안쪽 공간, 곧 구(球)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아기가 세상에서 처음 살던 곳을 떠올려 보세요.
엄마 뱃속, 따뜻하고 둥글게 감싸인 방이었죠.
독일 철학자 피터 슬로터다이크(1947년생)는 사람이 태어난 뒤에도 평생 그런 둥근 방 안에서 산다고 말해요.
여기서 '둥근 방'이 바로 구체(球體), 독일어로 슈페렌(Sphären)이에요.
눈에 보이는 유리 공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나 한 무리의 우정처럼 '나를 감싸 주는 안쪽 공간'을 가리켜요.
슬로터다이크는 이렇게 정리해요.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국 어떤 형태를 만드는 이야기이고, 함께 뭉치는 모든 행동은 곧 안쪽 공간 하나를 새로 만드는 일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작은 구를 부풀리며 살고 있는 셈이에요.
슬로터다이크 이전에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를 깊이 파고들었어요.
슬로터다이크는 이 물음을 살짝 돌려놓아요.
'우리가 누구인가'보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어딘가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텅 빈 우주에 홀로 던져진 점이 아니라, 가족·친구·문화라는 둥근 막에 둘러싸여 숨 쉬고 있죠.
그 막이 어떤 모양이고 얼마나 튼튼한지를 보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그의 철학을 '구체 존재론'이라고 불러요.
존재를 '있음' 자체가 아니라 '어디에 함께 있음'으로 풀어낸 것이죠.
슬로터다이크는 이 생각을 『구체(Sphären)』라는 세 권짜리 책으로 펼쳤어요.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제목이 점점 커지는 순서라 기억하기 쉬워요.
| 권 | 원제 | 뜻 | 독일어 원서 |
|---|---|---|---|
| 1권 | Blasen | 거품들 | 1998년 |
| 2권 | Globen | 구들 | 1999년 |
| 3권 | Schäume | 포말들 | 2004년 |
작은 '거품'은 두 사람 사이처럼 가장 작은 친밀한 공간을, '구'는 하나의 세계나 제국처럼 커다란 공간을, '포말'은 거품이 잔뜩 모인 비눗방울 무더기처럼 오늘날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맞닿은 사회를 가리켜요.
참고로 1권 『거품들』의 영어 번역판(Bubbles)은 2011년에야 나왔어요.
원서가 나온 해와 번역판이 나온 해가 다르니 연도를 말할 때는 구분하는 게 좋아요.
슬로터다이크를 '냉소적인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의 첫 대표작 제목이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zynischen Vernunft)』(1983년)이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냉소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는 책이에요.
그는 근대의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enlightened false consciousness)'이라고 불렀어요.
무엇이 옳은지 다 배워서 알면서도 실천하지는 못하는, 똑똑하지만 불행한 마음이라는 뜻이죠.
대신 그는 옛 그리스의 견유학파, 특히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고 시장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한 디오게네스를 좋아했어요.
말로만 따지지 않고 몸으로 직접 부딪쳐 세상에 도전하는 태도, 그것을 살아 있는 저항으로 보았거든요.
냉소를 비판하고 그 반대편을 응원한 사람인 거예요.
구체 존재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요.
외로움이 클 때는 나를 감싸 주던 구가 얇아지거나 터진 것일 수 있다고요.
반대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작은 구 하나를 함께 부풀리는 중이라고요.
집·학교·나라·문화도 모두 사람을 길러 내려고 만든 따뜻한 온실 같은 구예요.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공기가 되어 줘요.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를 묻다 막힐 때, 슬로터다이크는 방향을 살짝 바꿔 보라고 권해요.
나는 지금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을까 하고요.
구체 존재론은 '있음'을 '어디에 함께 있음'으로 바꿔 읽는 철학이에요.
사람은 엄마 뱃속의 둥근 방처럼 늘 누군가와 함께 만든 안쪽 공간, 곧 구 안에서 살아가요.
슬로터다이크는 이 생각을 거품·구·포말이라는 세 권의 책으로 펼쳤고, 냉소를 감싸 안은 게 아니라 오히려 냉소를 비판한 사람이었어요.
오늘 마음이 허전하다면, 나를 감싼 구가 지금 어떤 모양인지 한번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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