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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자연화된 인식론은 "지식이란 무엇인가"를 머릿속 추론만으로 따지지 말고,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보고 듣고 배우는지를 과학으로 함께 들여다보자는 콰인의 제안이에요.

혹시 "내가 아는 게 정말 맞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철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이 질문을 안락의자에 앉아 머리로만 풀려고 했어요. 미국 철학자 윌러드 콰인은 1908년부터 2000년까지 살면서 여기에 정면으로 딴지를 걸었어요. "그렇게 머리로만 굴리지 말고, 과학자처럼 실제 일어나는 일을 보자"고요. 이 글에서는 그가 무엇을 깨뜨렸고, 그 자리에 무엇을 새로 놓았는지 차근차근 보여드릴게요.

콰인은 1951년에 쓴 글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에서 당시 철학자들이 굳게 믿던 두 가지를 흔들어요.
첫째는 "뜻만 따져도 참인 문장"과 "세상을 봐야 아는 문장"을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이에요. 예를 들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뜻만 봐도 참이고, "지금 비가 온다"는 창밖을 봐야 알 수 있죠.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콰인은 이 경계선이 생각만큼 또렷하지 않다고 했어요. "뜻"이라는 게 무엇인지부터가 깔끔하게 정의되지 않으니까요.
둘째는 문장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내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에요. 콰인은 여기에도 고개를 저어요. 우리의 지식은 한 올씩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거미줄 같다고요. 한쪽 끄트머리를 톡 건드리면 거미줄 전체가 출렁이듯, 어떤 믿음 하나를 바꾸면 그것과 이어진 다른 믿음들도 함께 흔들린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걸까요? 콰인은 1969년 글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답을 내놓아요. 지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사람을 실제로 관찰하라는 거예요.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자전거 타는 법을 책상에 앉아 정의만 내리는 사람과, 아이가 실제로 어떻게 넘어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 자전거를 더 잘 알게 될까요? 콰인은 두 번째 사람 편에 서요. 우리 눈에 빛이 들어오고(과학에서 말하는 자극), 머릿속을 거쳐, 입에서 문장이 나오는(우리가 가진 이론) 그 과정을 심리학과 과학으로 들여다보자는 거죠.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을 과학의 한 챕터 안으로 넣자는, 당시로서는 꽤 과감한 제안이었어요.

여기서 똑똑한 반박이 나와요. "과학으로 지식을 설명한다고? 그런데 과학 자체가 이미 지식이잖아. 결국 빙글빙글 도는 거 아니야?" 날카로운 지적이고, 콰인도 이 점을 인정했어요. 하지만 그는 이 순환을 무서워하지 말자고 해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완벽하게 깨끗한 출발점 같은 건 없으니까요.
콰인이 즐겨 쓴 그림이 하나 있어요.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고치는 선원과 같아요. 배를 통째로 뭍에 올려놓고 새로 짤 수는 없어요. 물 위에 떠 있는 채로, 지금 밟고 선 널빤지를 빼면 안 되니 다른 부분부터 한 장씩 갈아 끼우는 거죠. 우리 지식도 그래요. 이미 가진 지식 위에 서서, 그것을 조금씩 고쳐 나갈 뿐이에요.

정리해 볼게요. 콰인은 지식을 머리로만 따지던 오랜 습관에 멈춤 신호를 보낸 사람이에요. 뜻으로 참인 문장과 경험으로 참인 문장의 경계를 의심했고, 우리 지식은 거미줄처럼 통째로 엮여 있다고 봤어요. 그리고 "지식이 뭐냐"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사람을 실제로 관찰하는 과학에 기대자고 했죠. 다음에 "이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하는 궁금증이 생길 때, 그 답이 책상이 아니라 관찰하는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콰인이 우리에게 남긴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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