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상상해 볼까요. 어떤 교실에 키 큰 아이 한 명이 '기준'이 돼요. 선생님은 그 아이를 보통 사람이라 부르고,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저 아이보다 키가 모자란 아이'로만 불려요. 작은 아이도, 통통한 아이도, 곱슬머리 아이도 자기 이름이 아니라 기준에서 얼마나 모자란가로만 설명돼요.
좀 이상하죠? 그런데 뤼스 이리가레라는 철학자는, 서양이 2천 년 넘게 사람을 생각해 온 방식이 딱 이랬다고 말해요. 한쪽을 사람의 기준으로 두고, 다른 쪽은 그 기준의 모자란 복사본으로 다뤘다는 거예요. 이 글은 그가 그 버릇을 어떻게 꼬집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옛날 철학책을 펼치면 '인간은 이성적이다', '인간은 무엇을 욕망한다' 같은 문장이 가득해요. 말로는 인간, 곧 모두를 가리키는 것 같죠. 그런데 이리가레는 묻습니다. 그 인간이라는 자리에 실제로 누가 그려져 있었나요?
그가 보기엔 그 자리에 늘 남성이 서 있었어요. 여성은 독립된 또 한 사람이 아니라, 남성을 비춰 주는 거울이거나, 남성에게 있는 것이 빠진 모자란 남성으로 설명됐고요. 마치 교실의 작은 아이처럼, 여성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남성에 견줘 무엇이 없는가로만 적혔다는 거예요. 이렇게 세상 전체를 한쪽 기준으로 재는 큰 생각의 틀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리가레는 바로 그 틀을 의심한 거예요.

이리가레는 1930년에 벨기에에서 태어났어요. 철학자이면서, 마음을 다루는 정신분석가였고, 말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이기도 했어요. 한 사람이 세 분야를 함께 한 셈이죠.
젊을 때 그는 유명한 정신분석가 라캉 곁에서 배웠어요. 그런데 1974년, '다른 여성의 거울'이라는 뜻을 담은 책을 펴내면서 사이가 틀어집니다. 그 책에서 그는 존경받던 스승들의 생각마저 여성을 거울로만 다룬다고 정면으로 꼬집었거든요. 그 일로 그는 가르치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라캉의 모임에서도 떨어져 나와요. 자기 생각을 지키려고 안정된 자리를 내놓은 셈이에요.

그가 특히 따진 상대가 정신분석이에요. 정신분석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겠다며 시작된 학문인데, 그 설명 방식에도 같은 버릇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정신분석의 시작을 연 프로이트는 여성의 마음을, 남성에게 있는 것이 여성에게는 없다는 데서 출발해 설명하곤 했어요. 또 그 모자람을 부러워한다고 봤고요. 이리가레가 보기에 이건 여성을 다시 한번 빼기 기호, 곧 마이너스로 만든 거예요. 여성을 여성의 자리에서 바라보지 않고, 남성에게서 무엇을 뺀 존재로만 본 거죠. 마음을 깊이 본다던 학문조차 한쪽을 기준 삼고 있었던 거예요.

이리가레의 핵심 단어는 성차, 곧 성의 차이예요. 말은 어렵지만 뜻은 단순해요.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기준과 그 모자란 복사본이 아니라, 서로 한쪽으로 줄여 버릴 수 없는 두 사람이라는 거예요.
다시 교실로 가 볼게요. 작은 아이는 큰 아이의 덜 자란 판이 아니에요. 그냥 다른 아이예요. 좋아하는 것도, 보는 세상도 달라요. 이리가레가 말하는 성차도 비슷해요. 여성을 남성의 잣대로 재서 무엇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 여성은 여성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또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자는 거죠.

여기서 윤리학이 붙는 이유가 나와요. 윤리학은 거창한 게 아니라 서로 어떻게 대할까에 대한 이야기예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거울로만 쓰면 거기엔 진짜 만남이 없어요. 상대가 내 모습을 비춰 주기만 바라니까요. 이리가레는 두 사람이 서로 다름을 그대로 둔 채 마주 보는 관계를 꿈꿔요. 너를 나처럼 만들지 않고, 너의 다름을 지워 없애지 않고, 그 사이의 거리를 존중하면서 만나는 것. 그는 이걸 새로운 윤리, 성차의 윤리학이라 불렀어요.
이리가레는 책상 앞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도 모아 살폈어요. 언어학자였으니까요. 그가 보기에 우리가 쓰는 말 자체가 한쪽을 기본값으로 깔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여럿을 가리킬 때 남성을 뜻하는 표현이 대표로 쓰이는 언어가 많죠. 작은 문법 같지만, 그 안에 기준은 한쪽이라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그는 생각을 바꾸려면 말부터 다시 봐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이, 누구를 사람의 기준으로 두는지 매일 정하고 있으니까요.

이리가레의 이야기는 결국 한 문장으로 모여요. 다른 사람을 내 거울로 쓰지 말고, 다른 사람으로 마주 보자. 서양 철학과 정신분석이 오랫동안 한쪽을 기준 삼고 다른 쪽을 모자란 복사본으로 그렸다면, 그는 둘은 정말 다른 두 사람이라는 데서 다시 시작하자고 했어요. 그 다름을 지우지 않고 거리를 존중하는 태도, 그걸 그는 성차의 윤리학이라 불렀고요. 누군가를 나보다 모자란 누구가 아니라 나와 다른 누구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윤리학의 첫걸음을 뗀 거예요.
4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