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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면, 내 몸 어딘가에 "진짜 나"가 따로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마치 머릿속에 작은 운전석이 있고, 거기 앉은 누군가가 내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손과 발을 조종하는 느낌이죠. 손은 그냥 도구이고, 그 도구를 부리는 "나"는 몸과는 다른 무언가처럼 느껴지고요.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 느낌을 그대로 믿었어요. 몸은 몸이고, 마음이나 영혼은 따로 있는 특별한 것이라고요. 그런데 한 철학자가 이렇게 되물었어요. "그 느낌이 사실은 뇌가 만들어 낸 거라면요?"

그 철학자가 바로 1943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난 퍼트리샤 처칠랜드예요. 그는 철학자인데도 도서관에만 있지 않고,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로 들어갔어요. 신경세포가 어떻게 신호를 주고받는지, 뇌가 다치면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직접 공부했죠.
그러면서 그는 "신경철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어요. 어려운 말 같지만 뜻은 단순해요. 마음이 무엇이냐, 나란 무엇이냐 같은 오래된 철학 질문에 답하려면 뇌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예요. 책상 앞에서 생각만 굴리지 말고, 실제 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증거로 삼자는 태도죠.

처칠랜드의 핵심 생각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어요. "마음은 뇌가 하는 일이다."
비유를 들어 볼게요. 우리는 위장 속에 따로 "소화의 정령"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위가 움직이고 위액이 나오면서 음식을 잘게 부수는 것, 그 일 자체를 소화라고 부르죠. 소화는 위가 "하는 일"이지, 위 안에 따로 든 물건이 아니에요.
처칠랜드는 마음도 똑같다고 봐요. 뇌 속 신경세포 수백억 개가 쉼 없이 신호를 주고받는 일, 바로 그 활동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모든 것이라는 거예요. "나"라는 느낌조차도 뇌가 자기 몸과 기억을 하나로 묶어 만들어 내는 작용이고요. 머릿속 운전석에 앉은 작은 누군가는 없고, 뇌의 활동 그 자체가 곧 나인 셈이죠.

처칠랜드가 여기서 멈췄다면 그냥 흥미로운 주장으로 끝났을 거예요. 그런데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덕,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느끼는 마음까지 뇌로 설명하려 했어요.
2011년에 펴낸 책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엄마가 아기를 보면 끔찍이 아끼고 돌보게 되는 데에는 옥시토신이라는 뇌 속 물질이 큰 역할을 한다고요. 이 물질은 사람을 비롯한 여러 포유동물이 새끼와 가족을 챙기도록 돕는 일을 해요. 처칠랜드는 우리가 남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마음도 여기서부터 자라났다고 봐요.
그러니까 도덕은 저 멀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규칙이 아니라, 무리 지어 살아남아야 했던 동물의 뇌가 오랜 시간에 걸쳐 길러 낸 돌봄의 본능에서 출발했다는 거예요. 친구가 다치면 마음이 아픈 것도,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것도 뇌가 빚어낸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설명이죠.

이 생각을 받아들이면 많은 게 달라져요. 누군가 뇌를 다친 뒤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나빠진 게 아니라 마음을 만들던 뇌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마음을 손에 잡히는 뇌의 일로 보면, 우울이나 불안 같은 어려움도 더 차분하게 다룰 길이 열리고요.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에요. "빨강을 볼 때의 그 생생한 느낌까지 신경세포만으로 다 설명될까?" 하고 묻는 사람도 많아요. 처칠랜드도 모든 답을 가진 건 아니고, 아직 모르는 건 모른다고 두죠. 다만 그는 답을 찾을 곳이 뇌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했어요.

퍼트리샤 처칠랜드는 "마음은 뇌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평생 밀고 나간 철학자예요. 위가 소화를 하듯 뇌가 마음을 한다고 보았고, 머릿속 따로 있는 "나" 대신 뇌의 활동 그 자체를 나라고 불렀죠. 옳고 그름을 느끼는 도덕마저 무리 지어 살던 동물의 돌봄 본능에서 자랐다고 설명했고요. 다 풀린 답은 아니지만, 마음을 신비가 아니라 살펴볼 수 있는 뇌의 일로 옮겨 놓았다는 점, 그 한 가지만 기억해도 충분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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