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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아이리스 머독이 즐겨 든 장면 하나를 먼저 볼게요.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마뜩잖게 봐요. 말투는 천박하고, 행동은 가볍고, 우리 아들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하죠. 그런데 이 시어머니는 점잖은 사람이라 그런 속내를 겉으로는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아요. 며느리에게 늘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죠.
겉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시어머니는 이미 '착하게' 행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머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물어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시어머니가 시간을 들여 며느리를 가만히, 다시 들여다봐요. 그러자 천박해 보이던 게 사실은 꾸밈없이 솔직한 거였고, 가벼워 보이던 게 사실은 젊고 자유로운 거였다는 걸 알게 돼요. 행동은 하나도 안 변했는데, 보는 눈이 바뀐 거예요. 머독은 바로 이 '눈이 바뀌는 일'이 도덕의 핵심이라고 봤어요.

우리는 보통 도덕을 '선택의 순간'으로 생각해요. 거짓말을 할까 말까, 도울까 말까. 갈림길에 서서 옳은 쪽을 고르는 그 순간이 도덕이라는 거죠. 머독이 살던 시절(1919년부터 1999년까지) 철학에서도 이 생각이 주류였어요. 중요한 건 행동과 선택이고, 마음속에서 무얼 보든 그건 사적인 일이라는 거였죠.
머독은 여기에 고개를 갸웃해요. 갈림길에 섰을 때 우리가 어느 쪽을 고를지는, 사실 그 순간이 오기 한참 전에 거의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평소에 세상을 어떻게 봐 왔느냐가 결정적이거든요.
며느리를 줄곧 천박한 사람으로만 봐 온 시어머니와, 발랄한 사람으로 다시 보게 된 시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하게 돼요. 그러니 도덕은 결심하는 1초가 아니라, 그 1초를 만드는 평소의 시선 전체인 셈이죠.

머독이 말한 '주의(attention)'는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누군가를 제대로, 끝까지 보려는 마음이에요. 친구가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쟤 또 예민하게 구네' 하고 내 식대로 단정하면, 친구는 영영 안 보여요. 대신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제야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요.
머독은 이걸 '공정하고 사랑 어린 시선'이라고 불렀어요. 내 기대나 짜증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를 내 머릿속 그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에요. 잘 보는 게 곧 잘 대하는 일의 시작이라는 거죠.

그런데 제대로 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머독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자기 얘기만 하는 '욕심 많은 자아'가 있어서라고 해요. 불안, 자존심, 내가 손해 볼까 하는 계산. 이런 것들이 안경에 김처럼 서려서 상대를 흐리게 만들어요. 며느리가 천박해 보였던 것도, 사실은 아들을 빼앗긴 듯한 서운함이 시어머니의 눈을 가렸기 때문일 수 있어요.
머독은 이 김을 닦아 내는 일을 '자기 비우기'라고 불렀어요. 거창한 게 아니에요. 창밖에 새 한 마리가 가만히 떠 있는 걸 넋 놓고 바라보는 순간, 잠깐 '나'를 잊죠? 그렇게 자기를 잠시 내려놓을 때 비로소 바깥의 진짜가 들어와요. 도덕도 그렇게, 나를 비운 자리에 상대를 들이는 일이에요.

머독이 이 생각에 끌린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는 철학책만 쓴 사람이 아니라, 스물여섯 편의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했거든요. 좋은 소설은 한 사람을 천천히, 여러 겹으로 보여 주잖아요. 미워 보이던 인물이 몇 장 넘기면 안쓰러워지고요. 머독에게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곧 '주의'를 연습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의 윤리는 규칙을 외우라고 하지 않아요. 대신 옆 사람을 한 번 더, 조금 더 정성껏 보라고 권해요. 거창한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시선을 다듬는 일. 그게 더 어렵고 더 진짜라고 본 거죠.

머독의 주의의 윤리는 이렇게 묶을 수 있어요. 착함은 결심하는 한순간이 아니라, 평소에 세상을 보는 눈에서 자란다는 것. 그 눈을 흐리는 건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는 욕심 많은 자아라는 것. 그래서 도덕의 첫걸음은 나를 잠깐 비우고 옆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라는 것. 며느리를 다시 본 시어머니처럼, 우리도 오늘 누군가를 한 번 더 천천히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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