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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영화관에는 지구가 망하는 이야기가 넘쳐요. 운석이 떨어지고, 좀비가 거리를 메우고, 바다가 도시를 삼키죠. 우리는 세상의 끝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상상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어요. "돈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 말고,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세상"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요. 지구가 부서지는 건 그려도, 자본주의가 끝난 다음 날 아침은 잘 안 그려지는 거예요.
바로 이 묘한 느낌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영국의 이론가 마크 피셔예요.

마크 피셔는 1968년에 태어나 2017년까지 살았던 영국 사람이에요. 대단한 대학교수라기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면서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꾸준히 올리던 사람이었어요. 거창한 학술서 대신, 자기가 보고 느낀 영화와 음악과 일상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었죠.
그가 2009년에 낸 책이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에요. 100쪽도 안 되는 아주 얇은 책인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찔렀어요.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말로 못 하던 걸, 피셔가 대신 또렷하게 말해 줬거든요.

자본주의 리얼리즘. 말이 어렵죠. 풀어 볼게요.
물고기한테 "물이 뭐야?"라고 물으면 물고기는 어리둥절할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물에 둘러싸여 있어서, 물이 그냥 '세상 전부'니까요. 물 밖을 본 적이 없으니 물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는 거죠.
피셔가 말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딱 이거예요.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 그러니까 거의 모든 걸 돈으로 사고팔고 경쟁하는 이 방식이 너무 당연해진 나머지, 사람들이 "이게 유일한 길이고 다른 길은 없어"라고 느끼는 상태를 말해요. 여기서 '리얼리즘'은 '이게 진짜 옳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 말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그 답답한 분위기를 가리켜요. 피셔는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해요. 세상의 끝을 상상하기가,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기보다 더 쉽다고요.

피셔의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부분은 따로 있어요. 바로 우울과 마음의 병에 대한 거예요. 피셔 자신도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어요.
공기가 꽉 막힌 방에 오래 앉아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졸려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내가 게을러서 그래", "내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며 자기를 탓해요. 사실은 방의 공기를 바꿔야 하는데 말이죠. 피셔는 사람들의 불안과 우울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고 했어요. 끝없이 경쟁하고, 잘리지 않으려 애쓰고, 실패하면 전부 네 책임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마음이 지치는 건, 오직 그 사람 개인의 약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슬픔을 무조건 "내 문제"라고만 보면, 우리는 정작 방의 공기,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구조는 한 번도 의심하지 못하게 돼요.

피셔는 문화에서도 같은 답답함을 읽어 냈어요. 요즘 나오는 영화나 음악을 보면 옛날 것을 다시 만든 리메이크, 속편, 복고풍이 참 많죠. 분명 새것인데 어쩐지 예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요.
그는 이걸 두고, 우리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힘을 조금씩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물어요. 지난주에 봤던 재방송을 또 트는 텔레비전처럼, 시대 전체가 새 이야기 대신 옛 이야기를 계속 돌려 보고 있다는 거죠. 다른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도 잘 못 만들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피셔가 "우리는 끝났어"라며 손을 놓자는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대예요. 그는 이 답답함의 정체를 똑바로 보는 것 자체가 첫걸음이라고 봤어요.
물고기가 "아, 내가 물속에 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처음으로 물 밖을 상상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요. 지금이 유일한 길처럼 보이는 건 그게 진리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길을 떠올리는 연습을 안 해서일 수도 있다고요. 피셔는 다른 세상을 당장 설계해 주진 못했지만, "다르게 상상해도 괜찮다"는 문을 빼꼼 열어 두려 했어요.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지금 사는 방식이 너무 당연해 보여서 다른 길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워진 마음 상태를 가리켜요. 물고기가 물을 못 보듯이요. 그는 이 감각이 우리의 우울과 지친 마음, 그리고 자꾸 옛것만 반복하는 문화에까지 스며 있다고 봤어요. 기억할 한 가지는 이거예요. 어떤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처럼 보일 때, 그게 정말 유일해서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르게 상상하길 멈춰서인지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것. 그 작은 의심이 피셔가 남기고 싶었던 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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