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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새 놀이터에 처음 가도 누가 알려 주지 않은 규칙을 금방 알게 돼요. 그네는 한 번에 한 명씩 타고, 미끄럼틀은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오고, 줄을 서면 앞사람부터 차례예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죠. 이 규칙은 대체 누가 정했을까요? 하늘에서 글씨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어떤 왕이 도장을 쾅 찍어 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여럿이 같이 놀려면 이게 편하니까 저절로 생긴 거예요.
수백 년 전 사람들에게 "나라의 법은 누가 만들었나요?"라고 물으면 대답은 거의 정해져 있었어요. "신이 정하셨죠" 아니면 "왕이 정하셨죠". 그런데 한 학자가 나타나 조용히 다른 답을 내놨어요. "아니요. 사람들이 같이 살려고 스스로 만든 거예요." 오늘 이야기할 사무엘 푸펜도르프예요.

푸펜도르프는 지금의 독일 땅에서 1632년에 태어나 1694년까지, 그러니까 예순두 해를 산 학자예요.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으니 어릴 적부터 신앙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거예요.
그런데 그는 스물아홉 살 무렵 아주 특별한 자리에 앉아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자연법'을 가르치는 첫 교수가 된 거예요. 자연법만 따로 떼어 정식 과목으로 가르치는 자리는 그전까지 세상에 없었어요. 말하자면 푸펜도르프는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첫발을 디딘 사람인 셈이죠.

'자연법'이라는 말이 딱딱하게 들리죠. 쉽게 풀면 이래요. 누가 종이에 적어 두지 않아도 "이건 당연히 지켜야지" 싶은 규칙이 있잖아요. 한 약속은 지켜야 하고, 남을 까닭 없이 다치게 하면 안 되고, 빌린 건 돌려줘야 하고요. 이렇게 사람이라면 머리로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기본 규칙을 자연법이라고 불러요.
여기서 푸펜도르프가 던진 질문이 재밌어요. "그럼 이 규칙은 어디서 나온 걸까?" 그전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신이 정해 주신 거예요"라고 답했어요. 그런데 푸펜도르프는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른 눈으로 들여다봤어요.

푸펜도르프 생각은 이래요. 사람은 혼자서는 도무지 살기 어려워요. 몸도 약하고, 혼자 먹을 것을 다 구하기도 벅차고, 위험한 일이 닥치면 막아 줄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어울려 살아요. 그는 이 점을 '서로 어울려 살려는 성질'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면 같이 살기 위해 뭐가 필요할까요? 서로 해치지 않기, 한 약속 지키기, 어려울 때 도와주기 같은 규칙이 필요해요. 즉 규칙은 신이 저 위에서 내려보낸 명령이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사정 때문에 자연히 생긴다고 본 거예요.
이게 왜 대단하냐면요, 믿는 종교가 서로 달라도 이 규칙에는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거든요. 섬기는 신이 달라도 "같이 살려면 약속은 지켜야지"에는 누구나 동의하니까요. 이렇게 특정 신앙을 빼고도 두루 통하는 규칙을 찾으려 한 태도를 어려운 말로 '세속적'이라고 해요. 푸펜도르프가 한 일이 바로 이거예요.

푸펜도르프는 나라가 생기는 과정도 약속으로 풀어냈어요. 학급에서 반장을 새로 뽑는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먼저 아이들이 "우리 한 반으로 같이 지내자"라며 모여요. 다음으로 "반장을 한 명 두고 그 말을 따르기로 하자"라고 정해요. 마지막으로 뽑힌 반장에게 "네 말을 들을게, 대신 우리를 잘 챙겨 줘"라고 약속하죠.
푸펜도르프가 그린 나라도 이 순서와 꼭 닮았어요.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먼저 모이기로 약속하고, 누가 다스릴지 정하고, 그다음 그 다스리는 사람에게 따르기로 약속해요. 그러니까 나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한 사람이 힘으로 차지한 것도 아니라,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려고 차곡차곡 맺은 약속 덩어리인 거예요. 그리고 다스리는 쪽도 약속을 받은 사람이니, 사람들을 잘 지켜 줄 책임이 따라붙어요.

푸펜도르프가 마흔 살 무렵 펴낸 두꺼운 책들은 곧 유럽 곳곳에서 읽혔어요. 뒷날 나라와 권리를 깊이 고민한 학자들, 그리고 멀리 바다 건너에서 새 나라를 세우려던 사람들까지 그의 생각을 디딤돌로 삼았어요.
오늘 우리가 "법은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고, 권력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한참 전에 이런 길을 미리 닦아 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푸펜도르프는 그 길 앞쪽에 서서 곡괭이질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고요.

푸펜도르프는 "규칙은 신이 내려준 명령"이라는 오래된 답 대신, "사람이 같이 살려고 만든 약속"이라는 답을 내놓은 학자예요. 사람은 약해서 어울려 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연법이 생기고, 그 위에 약속으로 나라가 세워진다고 봤어요. 놀이터 규칙처럼 나라의 법도 결국 같이 잘 지내 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것, 이 한 가지만 품고 가도 충분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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