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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우리는 보통 말을 도구라고 생각해요. 머릿속에 먼저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을 전하려고 말이라는 상자에 담아 상대에게 보내는 거죠. 친구에게 "배고파"라고 말하면, 내 안의 배고픔이라는 내용물이 그 상자에 실려 친구에게 도착하는 식이에요. 이 그림에서 말은 그저 운반 수단이에요. 내용물이 진짜고, 상자는 다 쓰면 버려도 그만이죠.
그런데 한 독일 철학자가 이 익숙한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어요. "정말 그럴까? 만약 '배고프다'는 말 자체가 없었다면, 너는 그 느낌을 떠올리고 구분하기나 했을까?" 이 작은 질문에서 아주 다른 생각이 시작돼요.

그 철학자가 남긴 유명한 문장이 하나 있어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사람의 말인데, 처음 들으면 멋있긴 한데 무슨 뜻인지 잘 안 잡혀요. '집'이라는 단어에 천천히 기대 볼게요.
집은 그냥 벽돌 더미가 아니에요. 사람이 그 안에 살아요. 집이 있어야 비바람을 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죠. 집이 없으면 사람은 머물 곳 없이 떠돌아요.
하이데거는 '존재', 그러니까 무언가가 '있다'는 그 사실도 마찬가지라고 봤어요.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언어라는 집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우리 앞에 머물 수 있다는 거예요. 말은 내용물을 잠깐 나르고 버려지는 상자가 아니라, 있는 것들이 들어와 사는 살림집이라는 거죠. 그래서 말을 잃는 건 단순히 단어 하나를 잊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살던 무언가가 머물 곳을 잃는 일이 돼요.

조금 더 손에 잡히게 해 볼게요. 숲을 걷는 두 사람을 떠올려 봐요. 한 사람은 나무 이름을 하나도 몰라요. 그에게 숲은 그냥 커다란 '초록색 덩어리'예요. 다른 사람은 참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를 구분할 줄 알아요. 그에게 같은 숲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나무들이 모인 곳이에요.
똑같은 숲인데 두 사람 앞에 펼쳐진 세계가 달라요. '자작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만, 그 하얀 나무는 비로소 '저기 있는 것'으로 또렷이 떠올라요. 이름이 없으면 그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죠.
무지개도 그래요. 우리는 흔히 무지개를 일곱 빛깔이라 하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는 색을 가리키는 말이 적어서 무지개를 두세 가지 색으로만 봐요. 빛은 똑같이 이어져 있는데, 가진 말의 수만큼 색이 나뉘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무언가가 우리에게 '있게' 되는 자리예요. 집에 불이 켜지면 그제야 그 안의 살림이 보이는 것처럼요.

아기를 보면 이 이야기가 더 분명해져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세상은 뒤섞인 빛과 소리 덩어리에 가까워요. 그러다 '엄마'라는 말을 배우면, 수많은 얼굴 가운데 한 사람이 또렷한 '엄마'로 떠올라요. '뜨거워'라는 말을 배우면, 막연히 피하던 느낌이 '뜨거움'이라는 또렷한 것으로 자리를 잡죠.
말을 하나 배울 때마다 아기 앞의 세계는 한 칸씩 넓어지고 또렷해져요. 생각이 먼저 다 있고 말을 나중에 붙이는 게 아니라, 말과 함께 세계가 같이 자라는 거예요. 하이데거가 말한 '집'이 바로 이거예요. 우리는 언어라는 집을 한 칸씩 늘리면서, 그 안에 점점 더 많은 것을 들여 살아가요.

하이데거는 1889년부터 1976년까지 살았던 독일 철학자예요. 그가 서른여덟 살이던 1927년에 펴낸 책이 《존재와 시간》인데,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논의된 책 가운데 하나로 꼽혀요.
그가 평생 붙들고 늘어진 질문은 뜻밖에 단순해요. "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컵이 있다", "내가 있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쓰면서도, 정작 '있다'가 무엇인지는 한 번도 묻지 않잖아요. 하이데거는 그 당연해 보이는 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먼저 '묻고 있는 우리 자신'부터 들여다봤어요. 이걸 그는 현존재라고 불렀어요. 어려운 말 같지만, '지금 여기 살면서 자기가 있다는 걸 신경 쓰는 존재', 바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리고 이 긴 물음의 끝에서, 있는 것들이 머무는 자리가 결국 언어라는 데까지 다다랐어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문장은 그가 1947년에 발표한 글에 나와요.

이 생각은 우리가 말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 놔요. 말이 그저 도구라면, 좀 거칠게 써도 뜻만 통하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말이 있는 것들이 사는 집이라면, 말을 함부로 다루는 건 그 집을 허무는 일이 돼요.
가까운 예가 마음이에요. 어떤 감정에 이름을 붙일 줄 모르면, 그 감정은 그냥 흐릿한 답답함으로만 남아요. '서운하다'와 '억울하다'를 구분하는 말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을 훨씬 또렷이 들여다보고 살 수 있어요. 새 말을 배우는 건 집에 방 한 칸을 들이는 일이고, 쓸 줄 아는 말이 줄어드는 건 살 수 있는 세계가 그만큼 좁아지는 일이에요. 하이데거가 시와 언어를 그토록 귀하게 여긴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은, 말이 생각을 잠깐 나르는 빈 상자가 아니라 있는 것들이 들어와 사는 살림집이라는 뜻이에요. 이름이 있을 때 자작나무가 비로소 보이고 아기 앞에 '엄마'가 떠오르듯, 무언가는 말 안에 자리를 얻어야 우리 앞에 머물러요. 그러니 어떤 말을 알고 어떻게 쓰느냐는, 내가 살아갈 세계가 얼마나 넓고 또렷한지를 함께 정하는 일이에요. 다음에 낯선 말 하나를 새로 만나면, 내 세계에 방 한 칸이 늘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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