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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우리는 '5분만 더' 하고 스누즈 버튼을 누르죠. 분명히 일어나야 하는 걸 알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미뤄 둬요. 죽음을 대하는 우리 마음도 비슷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지만, 그건 먼 훗날 남의 일처럼 느끼고 오늘 할 일 밑에 묻어 두죠. 한 독일 철학자는 바로 이 '미뤄 두기'를 붙잡고, 거기에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숨어 있다고 봤어요.

그 철학자가 마르틴 하이데거예요. 1889년에 태어나 1976년까지 살았으니 여든일곱 해를 산 사람이고, 1927년에 펴낸 책 '존재와 시간'으로 이름을 알렸어요. 그가 던진 질문은 좀 엉뚱하게 들려요. '있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컵이 있고, 나무가 있고, 내가 있어요. 다 똑같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람이 있는 방식은 컵이 있는 방식과 달라요. 컵은 자기가 있다는 걸 모르지만, 사람은 자기가 있다는 걸 알고 고민하니까요. 하이데거는 이렇게 자기 존재를 묻는 사람을 '현존재'라고 불렀어요.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하면 음울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담담한 관찰이에요. 강을 따라 흐르는 배는 강이 끝나는 바다를 향해 가고 있죠. 사람도 태어난 순간부터 끝을 향해 가는 중이에요. 중요한 건 사람만이 그 끝을 미리 안다는 점이에요. 강아지는 오늘을 살지만 '나는 언젠가 죽는다'를 떠올리진 않아요. 사람은 떠올려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사람을 늘 자기 끝을 의식하며 사는 존재, 곧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끝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 해요. 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은 다 죽는 거지' 하고 넘기죠. 맞는 말이지만, 이 말에는 묘한 회피가 숨어 있어요. 죽음을 '누구나 겪는 일반적인 일'로 바꿔서, 정작 내 죽음은 아니라고 밀어내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이렇게 '남들'에 섞여 평균치 뒤에 숨는 모습을 지적했어요. 다들 그러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하고 흘러가는 거죠.

하지만 죽음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어요. 누가 대신 시험을 봐 줄 수도 있고 대신 줄을 서 줄 수도 있지만, 내 죽음만큼은 그 누구도 대신 죽어 줄 수 없어요. 그건 오롯이 나만의 것이에요.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이 진짜 자기 자신이 된다고 봤어요. '사람은 다 죽지'라는 남의 말에서 '나는 죽는다'라는 나의 일로 옮겨 올 때, 비로소 남들 틈에 묻혀 있던 내가 또렷한 한 사람으로 떠오르거든요.

그래서 죽음을 향한 존재는 죽음을 무서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끝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때 오늘이 또렷해진다는 이야기예요. 여행이 영원하다면 우리는 아무 날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예요. 돌아갈 날이 정해져 있으니 오늘 본 골목 하나가 마음에 남죠. 끝을 미뤄 두고 남들처럼 흘러가는 대신, 끝을 마주 보고 '그럼 나는 어떻게 살까'를 묻는 것. 하이데거는 이렇게 사는 모습을 자기 삶을 자기가 사는 '본래적인' 삶이라고 불렀어요.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는 사람이 자기 끝을 미리 아는 유일한 존재라는 데서 출발해요. 우리는 보통 '사람은 다 죽지'라며 그 끝을 남의 일로 미뤄 두지만, 내 죽음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요. 그 사실을 똑바로 마주할 때 우리는 남들 틈에서 빠져나와 또렷한 한 사람이 되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지 스스로 묻게 돼요.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어둡게만 느껴졌다면, 그건 오늘을 더 내 것으로 만들려는 질문이었던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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