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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지금 주위를 한번 둘러볼까요. 의자가 있고, 컵이 있고, 어쩌면 강아지도 한 마리 엎드려 있을지 몰라요. 이것들은 모두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어요. 의자는 자기가 있다는 걸 모릅니다. 컵도 마찬가지예요. 강아지는 배고프면 밥을 찾지만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구나' 하고 곰곰이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직 한 종류만 달라요. 바로 여러분이에요. 밤에 누워서 문득 '내가 왜 여기 있지', '있다는 건 대체 뭘까' 하고 멈칫해 본 적 있죠. 이 멈칫함이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이에요.

우리는 '있다'를 하루에도 수십 번 써요. 약속이 있다, 시간이 있다, 친구가 있다.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따져 보지 않죠. 그런데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독일 철학자는 바로 여기서 멈춰 섰어요.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구별을 하나 해 볼게요. 책상 위 사과 한 개는 '있는 것', 즉 존재자예요. 반면에 그 사과가 '있다'는 사실 자체, 그 있음은 존재예요. 우리는 사과는 잘 보면서, 정작 '있음' 그 자체는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어요. 하이데거는 이 잊혀진 질문을 다시 꺼냈어요.

하이데거는 1889년부터 1976년까지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가 1927년에 펴낸 책이 바로 '존재와 시간'이에요. 이 책에서 그는 평생의 질문을 던져요. 존재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요. 사과한테 '너 있다는 게 뭐니' 하고 물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있음'을 궁금해하는 유일한 존재, 바로 인간부터 살펴보기로 해요.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냥 인간이라 부르지 않고 현존재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러요. 독일어로 다자인인데, '거기'를 뜻하는 다와 '있음'을 뜻하는 자인을 붙인 말이에요. 풀면 '거기 있음'이에요.
왜 이렇게 불렀을까요. 인간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있다는 걸 늘 신경 쓰면서 있기 때문이에요. 내일이 걱정되고, 어제가 후회되고, 지금 이게 맞나 싶죠. 의자는 절대 안 하는 일이에요. 현존재란, 자기 있음을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에요.

현존재에겐 또 하나 특징이 있어요. 우리는 텅 빈 공간에 혼자 떠 있는 법이 없어요. 항상 무언가 속에 들어가 있죠. 아침에 눈뜨면 이미 학교가 있고, 가족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하이데거는 이걸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고 불러요.
쉽게 말하면 이래요. 망치를 쓸 때 우리는 망치를 빤히 관찰하지 않아요. 그냥 못을 박는 일에 푹 빠져서 손이 알아서 움직여요. 망치가 부러져야 비로소 '아, 망치가 있었지' 하고 깨닫죠. 우리 삶도 그래요. 평소엔 세상과 한 몸처럼 살다가, 무언가 어긋날 때 문득 '있음'이 눈에 들어와요.

제목에도 들어 있는 '시간'은 여기서 등장해요. 현존재는 다른 동물과 달리 자기에게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말이에요. 무섭게 들리지만, 하이데거는 이걸 다르게 봤어요.
게임에 시간 제한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무 때나 해도 되니까 지금 할 이유가 없어져요.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끝난다고 하면, 갑자기 이 순간이 소중해지죠. 삶도 똑같아요. 끝이 있기 때문에 오늘 누구와 무엇을 하며 보낼지가 진짜 내 문제가 돼요. 시간은 현존재를 짓누르는 무게가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바탕인 셈이에요.

의자는 자기가 있는 줄 모르지만 우리는 알아요. 하이데거는 이 차이에서 출발해, '있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잊힌 질문을 다시 던졌어요. 그 답을 찾기 위해 자기 있음을 늘 문제 삼는 존재, 곧 현존재인 우리부터 들여다봤죠. 우리는 언제나 세계 속에 빠져 살고,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진짜 내 것으로 떠안게 돼요. 어려운 철학 같지만 결국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건넨 건 단순한 권유예요. 당연하게 흘려보내던 '있다'를, 오늘 한 번쯤 멈춰서 들여다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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