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가위 하나를 떠올려 볼게요. 가위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미 "종이를 자르는 물건"이라는 쓸모가 정해져 있었어요. 누군가 머릿속에 "자르는 도구가 필요해" 하고 먼저 생각했고, 그 생각에 맞춰 모양과 날을 만들었죠. 그러니까 가위는 쓸모가 먼저고, 그다음에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아기는 어떨까요? 아기는 태어날 때 "너는 이걸 하려고 태어났어"라는 쪽지를 손에 쥐고 나오지 않아요. 일단 먼저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만들어 가요. 장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바로 이 차이에 평생 매달렸어요. 1905년부터 1980년까지, 일흔다섯 해를 산 사람인데, 어려워 보이는 그의 말들도 사실은 이 가위와 아기 이야기에서 출발해요.

길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봐요. 돌멩이는 자기가 돌멩이라는 걸 몰라요. "나는 왜 여기 있지" 하고 고민하지도 않고요. 그냥 거기 빈틈없이 꽉 차서 있어요. 어제도 돌멩이였고 오늘도 돌멩이고, 자기 자신과 한 치의 거리도 없이 딱 붙어 있죠.
이렇게 "그냥 그것인 채로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사르트르는 즉자라고 불렀어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자기 자신에 그대로 들러붙어 있다"는 뜻이에요. 컵, 책상, 벽돌 같은 사물들이 다 즉자예요. 자기를 의심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는, 마음의 빈틈이 전혀 없는 상태요.

사람은 달라요.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내가 아까 그 말을 왜 했지" 하고 오늘의 나를 다시 떠올려 봐요. 거울 앞에서 "나 좀 달라지고 싶은데"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신기하죠? 나인데도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어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마주 보는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자라고 불렀어요. "자기를 마주한다"는 뜻이에요. 돌멩이는 자기에게 딱 붙어 있는데, 사람 마음은 자기에게서 살짝 떨어져 자기를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둘로 갈라져 있어요.

바로 여기서 무가 나와요. 돌멩이에는 빈틈이 없는데, 사람 마음에는 빈틈이 있어요.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늘 틈이 벌어져 있죠. 이 텅 빈 틈, 아직 채워지지 않은 자리를 사르트르는 무, 곧 없음이라고 불렀어요.
이 빈틈은 모자란 게 아니라 오히려 힘이에요. 친구가 시켜도 "아니, 안 할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냉장고를 열고 "어, 케이크가 없네" 하고 없는 것을 느끼는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을 상상하는 것도 다 이 빈틈 덕분이에요. 꽉 찬 돌멩이는 절대 못 하는 일이죠.

이제 가위와 아기 이야기로 돌아가요. 가위는 쓸모가 먼저 정해지고 만들어졌어요. 이 "미리 정해진 쓸모"를 본질이라고 해요. 반대로 사람은 일단 태어나서 존재부터 하고, 쓸모는 살면서 직접 정해요. 이 "일단 있음"을 실존이라고 하고요.
사르트르의 가장 유명한 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가 바로 이거예요. 사람한테는 정해진 사용 설명서가 없다는 뜻이에요. 의사가 될지 빵집을 열지, 어떤 사람이 될지는 태어날 때 적혀 있지 않고, 내가 하나하나 고른 선택들이 쌓여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정해진다는 거죠.

빈틈이 있으니 우리는 자유로워요. 언제든 "아니"라고 하고 다른 길을 고를 수 있으니까요. 듣기만 하면 신나는 말 같지만, 사르트르는 여기에 무거운 짝꿍을 붙여요. 바로 책임이에요.
가위는 잘 안 잘려도 "설계가 그래서 그래"라고 핑계를 댈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핑계를 떠넘길 설계도가 없어요. 내가 고른 거니까 결과도 내 몫이에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했어요. 자유가 선물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는 말이에요.

사르트르의 어려운 말들은 결국 하나로 묶여요. 돌멩이 같은 사물은 빈틈 없이 꽉 찬 즉자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빈틈을 품은 대자예요. 그 빈틈이 바로 무인데, 이 없음 덕분에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내일을 상상할 수 있어요. 가위와 달리 사람은 쓸모가 미리 정해지지 않은 채 태어나서, 선택을 쌓아 자기를 만들어 가죠.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고, 그 자유만큼 책임도 함께 진다는 것,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3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