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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문구점 서랍에 놓인 가위 하나를 떠올려 볼게요. 이 가위는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한참 전에, 이미 누군가의 머릿속에 먼저 있었어요. "종이랑 천을 자를 도구가 필요해" 하고요. 그 사람은 이게 무엇을 위한 물건인지, 어떤 모양에 얼마나 날카로워야 하는지를 다 정해 놓고 나서야 쇠를 깎고 손잡이를 붙였죠.
그러니까 가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가 먼저고, "실제로 여기 있는 것"은 나중이에요. 쓸모가 물건보다 앞서 있는 셈이에요.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만든 물건은 거의 다 이래요. 컵은 물을 담으려고, 의자는 앉으려고, 연필은 글씨를 쓰려고 만들어졌죠. 전부 만들어지기 전에 "이건 무엇을 하려고 있는 거야"라는 답이 먼저 정해져 있었어요.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등장해요. 1905년부터 1980년까지 살았던 사람인데, 1945년 파리에서 한 강연에서 어려운 말을 하나 남겼어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낱말이 낯서니 천천히 풀어 볼게요. '본질'은 방금 말한 가위의 쓸모 같은 거예요. "이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이죠. '실존'은 멋 부린 말 같지만 뜻은 단순해요. 그냥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이에요. 가위는 본질이 먼저고 실존이 나중이라고 했죠? 사르트르는 사람은 정반대라고 말해요. 사람한테는 실존이 먼저고, 본질이 나중이라고요.

사람은 가위와 달라요. 우리는 "너는 이걸 위해 태어났어"라는 답이 적힌 채로 세상에 오지 않아요. 그냥 먼저 태어나서, 여기 있게 돼요. 그게 '실존'이에요. 그러고 나서 살아가면서, 고르고 행동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만들어 가죠.
게임 캐릭터랑 비교하면 쉬워요. 게임 속 전사는 싸우라고, 치료사는 남을 살리라고 미리 정해져서 태어나요. 가위처럼요. 그런데 그 게임을 하는 '나'는 무슨 역할을 맡으라고 정해진 채로 태어나지 않았어요. 화가가 될지, 친절한 사람이 될지, 겁쟁이가 될지는 태어날 때 적혀 있던 게 아니에요. 내가 그린 그림, 내가 건넨 말, 내가 한 행동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요. 이게 그 한마디의 뜻이에요.

이 생각의 진짜 핵심은 '자유'예요. 가위는 종이 자르는 일 말고 다른 걸 고를 수 없어요. 쓸모가 이미 정해졌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미리 정해진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매 순간 "나는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를 스스로 고를 수 있어요. 이건 꽤 신나는 이야기예요. 내 모습이 처음부터 못 박혀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걸 조금 무겁게 표현했어요. "사람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요. 선고라는 건 보통 재판에서 내려지는 거잖아요. 자유가 마냥 즐겁기만 한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거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왜 자유를 무겁다고 했을까요?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으면, 내 모습에 대한 핑계도 댈 수 없거든요. "난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죠. 하지만 사르트르식으로 보면 '원래 그런 나'라는 건 없어요.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됐을 뿐이에요.
그래서 자유와 책임은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몸이에요. 내가 고를 수 있다는 건, 그 결과도 내가 떠안는다는 뜻이니까요. 사르트르 본인도 그렇게 살려고 했어요. 1964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정해졌는데, 그는 이 상을 거절했어요. 남이 붙여 주는 큰 이름표에 자기를 가두고 싶지 않았던 거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끝까지 자기가 정하겠다는 태도였어요.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정해진 게 없으면 그냥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되는 거 아냐?" 사르트르는 그렇지 않다고 봤어요. 오히려 반대예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한다는 건,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게 좋다"고 한 표를 던지는 일과 같다고 했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힘들어하는 친구를 모른 척한다면, 그건 단지 내 행동 하나로 끝나지 않아요. "곤란한 사람은 모른 척해도 된다"는 본보기를 세상에 하나 보태는 셈이에요. 그래서 정해진 답이 없을수록, 내 선택은 더 신중하고 무거워져요. 여기서 자유는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내가 책임지고"에 훨씬 가까운 말이에요.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뒤집어 보면 이건 희망이기도 해요.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었든, 바로 다음 선택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람은 가위 같은 물건과 다르다는 이야기예요. 물건은 쓸모가 먼저 정해진 다음 만들어지지만, 사람은 먼저 태어난 다음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정해 가요. 그래서 우리에겐 미리 적힌 답이 없고, 대신 매 순간 고를 자유가 있어요. 그 자유에는 핑계 댈 수 없는 책임이 따라오지만, 동시에 "나는 다음 선택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와요. 정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유롭다는 것, 이 한 줄이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건넨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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