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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200년쯤 전 독일에, 책상 위에 금빛 부처 조각상을 올려 두고 글을 쓰던 철학자가 있었어요. 이름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예요. 그 시절 유럽 사람들에게 부처나 인도 사상은 낯설고 먼 나라 이야기였어요. 직접 가 본 사람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그 멀고 낯선 동양의 생각을 자기 철학 한가운데로 끌어들였어요. 왜 독일 사람이 인도와 불교에 그렇게 빠졌을까요. 그 이야기를 천천히 해볼게요.
쇼펜하우어는 서른 살 무렵인 1818년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펴냈어요. 제목만 보면 머리가 아프죠. 쉽게 말하면 "세상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예요.
겉으로 보이는 세상이 한 겹이에요. 눈에 보이는 색, 귀에 들리는 소리, 손에 잡히는 물건들. 이걸 그는 '표상'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그 겉모습 뒤에서 모든 걸 밀고 당기는 진짜 힘이 또 한 겹 숨어 있다고 봤어요. 그게 '의지'예요. 이 두 단어가 책 제목에 그대로 들어가 있는 거죠.

'표상'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김이 뽀얗게 서린 유리창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는 유리 너머 진짜 세상을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유리에 맺힌 흐릿한 그림을 보고 있는 거예요.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보는 세상도 그렇다고 했어요. 있는 그대로의 진짜가 아니라, 우리 머릿속을 한 번 거쳐 비친 그림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생각은 사실 인도의 아주 오래된 책에 이미 있었어요. 인도에는 '마야'라는 말이 있어요. 세상은 얇은 베일처럼 우리 눈을 가리는 환상이라는 뜻이에요. 쇼펜하우어는 자기가 말한 '표상'이 바로 이 마야와 같은 이야기라며 무척 반가워했어요.

그럼 유리창 뒤에 숨은 진짜 힘, '의지'는 뭘까요. 배고픔을 떠올려 보세요. 밥을 먹으면 잠깐 괜찮다가, 몇 시간 뒤면 또 배가 고파져요.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죠. 쇼펜하우어는 세상 모든 것이 이런 끝없는 '원함'으로 움직인다고 봤어요. 사람뿐 아니라 자라는 나무도, 떨어지는 돌도 그 힘에 떠밀린다고요. 그걸 '의지'라고 불렀어요.
문제는 이 원함이 채워져도 잠깐뿐이고, 곧 또 다른 걸 원하게 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그는 삶이 기본적으로 고통 쪽에 가깝다고 봤어요.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보는 태도를 '염세주의'라고 해요.
끝없이 원해서 괴롭다는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불교가 오래전부터 해온 말이에요. 끝없는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가르침이죠. 쇼펜하우어는 자기 생각과 불교가 이렇게 닮은 걸 알아채고 기뻐했어요.
그가 동양 사상을 처음 깊이 만난 건 1810년대였어요. 인도의 옛 경전 '우파니샤드'를 라틴어로 옮긴 책을 읽었는데, 평생 그 책을 머리맡에 두고 "내 삶의 위로"라고 부를 만큼 아꼈어요. 그때까지 서양 철학자 중에 동양 사상을 이렇게 진지하게 끌어안은 사람은 거의 없었답니다.

쇼펜하우어 이전의 유럽 철학은 주로 기독교와 그리스 사상이라는 자기 뿌리 안에서만 생각했어요. 동양 사상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쯤으로 여겼고요. 쇼펜하우어는 그 벽을 넘어, 인도와 불교의 생각을 자기 철학을 짓는 진짜 재료로 가져다 썼어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비슷한 답에 닿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이른 시기의 다리였던 셈이에요.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겉모습인 '표상'과 그 뒤의 힘인 '의지', 이렇게 두 겹으로 봤어요. 세상은 베일 같은 환상이라는 인도의 '마야', 그리고 끝없는 원함이 고통을 낳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그의 생각과 나란히 놓였고요. 멀리 독일 사람이 책상에 부처 조각상을 둔 건 멋을 부린 게 아니라, 동양에서 진짜 답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는 동양과 서양의 생각을 이어 준 이른 다리로 기억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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