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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56년 여름, 암스테르담 유대인 공동체는 23살 청년에게 역사상 가장 가혹한 추방 선고를 내렸어요.
선고의 이름은 헤렘(cherem)이었어요.
유대교 공동체에서 누군가를 완전히 내치는 선고인데, 이날의 헤렘은 유독 강도가 달랐어요.
같은 공동체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걸거나 4미터 안에 다가오는 것조차 금지됐어요.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그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공식 기록에 아무 내용이 없어요.
어떤 말을 해서 랍비들이 격분했는지, 어떤 신성모독을 저질렀는지 적어놓지 않은 채 23살 청년이 평생 추방됐어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에요.
졸업 직전 동창들 전원에게 "이 사람과 말 걸면 너도 똑같이 처벌받는다"고 공지가 뜨는 거예요.
부모도, 형제도, 어릴 때 뛰어놀던 친구들도 일제히 등을 돌려요.
이유는 아무도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바뤼흐 스피노자는 그 자리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 침묵이 평생의 시작이었어요.

추방당한 청년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이 마지막 안전망이었어요.
그는 그것을 누이에게 통째로 넘겼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스피노자는 당당한 상속자였어요.
이복누이가 재산을 차지하려 했고, 스피노자는 법정에서 이겼어요.
그런데 판결이 나자마자 그는 유산 전부를 누이에게 돌려줬어요.
자기 몫으로 가져간 건 침대 하나뿐이었어요.
이후 헤이그 근처 작은 하숙방에서 렌즈를 깎으며 살았어요.
안경이나 망원경, 현미경에 들어가는 광학 렌즈를 손수 만들어 파는 일이었어요.
"어? 진짜?" 싶은 대목이 여기에요.
당대 유럽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호이겐스가 스피노자의 렌즈 솜씨를 직접 인정했어요.
호이겐스는 토성의 고리를 처음 관측한 천문학자예요.
그런데 그 작업이 결국 그를 죽였어요.
렌즈를 깎을 때 나오는 미세한 유리 가루가 폐 속으로 들어갔거든요.
스피노자는 44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추방된 렌즈 깎이에게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정교수직을 내밀었어요.
그는 6주 만에 거절했어요.
1673년 2월, 팔츠 선제후 카를 루트비히가 스피노자에게 공식 편지를 보냈어요.
팔츠 선제후는 오늘날 독일 서부 지역을 다스리던 유력 귀족이에요.
편지의 내용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정철학과 정교수직 제안이었어요.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86년에 세워진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에요.
정교수직이란 평생 직업이 보장된다는 뜻이에요.
평생 추방자로 하숙방에서 살던 사람에게 이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제안하는 거예요.
단서가 하나 붙어 있었어요.
"국교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철학할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건이었어요.
스피노자는 6주 동안 고민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답했어요.
"철학할 자유의 한계가 어디인지 미리 알 수 없어요. 나는 그 한계를 정해놓고 철학하는 법을 모르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에요.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던 사람이 대기업 정규직 자리를 제안받았어요.
근로계약서에 "회사 이미지를 해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요.
그 사람은 "회사 이미지를 해친다는 기준이 뭔지 먼저 알아야 서명할 수 있다"며 거절했어요.
그 자유가 어디서 끝나는지 모른다면, 처음부터 자유가 없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스피노자가 죽은 책상에는 라틴어 원고 한 묶음이 남아 있었어요.
친구들은 그 원고를 9개월 만에 익명으로 인쇄했어요.
1677년 2월, 스피노자는 44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어요.
책상 서랍에서 친구들이 발견한 건 에티카(Ethica)였어요.
부제가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인데, 수학 교과서처럼 공리에서 출발해 명제를 하나씩 증명하는 방식으로 쓴 철학책이에요.
책의 핵심은 딱 한 문장이에요.
"신 곧 자연(Deus sive Natura)"이에요.
신은 하늘 어딘가에 앉아 인간을 내려다보는 인격체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라는 주장이에요.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아니라, 자연 법칙 자체가 신이라는 거예요.
당시 유럽에서 이건 폭탄 발언이었어요.
친구들은 저자 이름을 숨기고 1677년 11월에 책을 출판했어요.
출판되자마자 유럽 전역에서 금서로 지정됐어요.
하지만 그 책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그의 사상을 계승했고, 아인슈타인은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어요.
20세기 철학자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자 중의 왕자"라고 불렀어요.
스피노자 본인은 평생 익명으로 살았어요.
파문 이후로는 책을 자기 이름으로 내지 않았어요.
결국 그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어요.
하이델베르크가 내민 자리를 거절하고, 렌즈 가루를 마시면서, 아무도 읽지 않을 라틴어 원고를 써내려간 그 하숙방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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