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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회의주의를 창시한 사람은 정작 자기 회의주의에 대해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어요.
피론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예요.
그는 서양 철학에서 회의주의, 즉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사상의 창시자로 꼽혀요.
3세기에 철학자들의 삶을 모은 기록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피론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상은 오직 제자 티몬이 쓴 시구를 통해서만 전해져요.
회사를 창업한 사람이 회사 소개서를 한 글자도 쓰지 않고, 직원이 남긴 메모로만 알려진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게 실수가 아니에요.
피론의 핵심 철학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은 주장하지도 말라"거든요.
자기 사상을 글로 못 박는 순간, 그건 틀릴 수도 있는 주장이 되어버려요.
글을 남기지 않는 것 자체가 철학이었던 거예요.

피론의 회의주의는 그리스가 아니라 인더스강 강가에서 시작됐을지도 몰라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에서 출발해 페르시아, 이집트,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밀고 들어갔어요.
피론은 스승 아낙사르코스를 따라 이 원정에 함께했어요.
아낙사르코스는 "세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 철학자였고, 데모크리토스 학파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갠지스 유역에서 피론은 김노소피스트들을 만납니다.
김노소피스트는 "나체 수행자"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옷도 걸치지 않고 수행하는 인도 고행자들을 가리켰어요.
이들은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감각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을 했습니다.
피론은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그 전까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방법만 달랐어요.
그런데 인도 수행자들은 아예 다른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찾는다는 그 시도 자체가 괜찮은 건가?"
현대 학자들은 피론의 회의주의가 이 만남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요.
서양 철학의 한 뿌리가 인도 사상과의 접촉에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친구들이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매일 따라다녀야 했다는 기록은, 정작 그가 9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과 충돌합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피론은 감각을 신뢰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은 진짜인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이 질문을 극단까지 밀고 간 결과, 그는 달려오는 마차 앞에서도, 높은 절벽 끄트머리에서도, 짖어대는 맹견 앞에서도 피하지 않았다고 해요.
친구들이 늘 곁에서 그를 잡아당겨야 했다는 일화도 함께 전해집니다.
폭풍이 치는 배 위에서는 태연하게 먹이를 먹는 돼지 한 마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저게 현자의 평정이야."
그런데 이 일화들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피론은 약 90세까지 살았습니다.
매일 마차와 절벽 앞에서 위험을 감수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장수한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들은 후대가 그의 철학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오늘날 SNS에서 화제가 되는 극단 라이프스타일 콘텐츠처럼, 진짜인지 연출인지 끝내 알 수 없는 감각이에요.
신에 대해 끝내 판단을 보류한 철학자에게 고향은 신을 모시는 가장 높은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피론의 고향은 엘리스예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북부에 있던 작은 도시 국가로, 지금의 올림픽 발상지 올림피아와 가까운 곳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피론은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결국 도시의 대제사장 직위에 올랐습니다.
대제사장은 신을 모시고 의식을 집행하는, 폴리스 안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역할이에요.
그런데 피론의 철학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무신론자임을 공언한 사람이 동네 교회의 가장 존경받는 어른으로 추대받는 상황이에요.
이 태도를 에포케라고 불러요.
에포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결론 내리기를 의도적으로 멈추는 거예요.
오늘날로 치면 "잘 모르겠으니까 판단 안 할게"를 삶의 원칙으로 삼은 거예요.
엘리스 시민들은 왜 그를 뽑았을까요.
피론은 논쟁하지 않았고, 남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그 흔들리지 않는 태도에서 무언가를 봤을 거예요.
심지어 엘리스는 피론의 영향으로 도시 안 모든 철학자에게 세금을 면제했다고 전해집니다.
한 글자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 마을 전체의 세금 정책을 바꿨어요.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수천 권의 철학책 중에서 이 정도 효과를 낸 것이 몇이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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