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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유럽 최고의 학자가 자기 발로 침묵의 규율 속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리고 곧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됩니다.
1240년대, 로저 베이컨은 파리와 옥스퍼드를 오가며 이름을 날리던 학자예요.
오늘날로 치면 아이비리그 정교수 자리를 꿰찬 셈이죠.
그런데 그 자리를 버리고 1257년경 프란치스코회에 자진 입회합니다.
프란치스코회는 가난을 서약한 탁발 수도회예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들어가는 곳이죠.
문제는 그 서약 목록에 '외부 저술 금지'가 포함돼 있었다는 거예요.
대기업 임원이 자발적으로 무소유 공동체에 들어갔는데, 그 공동체 규칙 1조가 '글쓰기 금지'인 상황이에요.
베이컨은 가장 활발히 사상을 펼쳐야 할 나이에 펜을 빼앗겼고, 그제야 자신이 어떤 우리 안으로 걸어 들어왔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베이컨은 모든 권위를 의심하라고 가르쳤어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이 입은 수도복의 권위만 빼고요.
당시 유럽 학계의 기본값은 스콜라 학풍이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에 써놓은 것을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이는 방식이죠.
오늘날로 치면 "교과서에 나와 있으니까 맞아"가 학문의 정점이던 시대예요.
베이컨은 그걸 정면으로 거부했어요.
그는 '경험학(scientia experimentalis)'이라는 개념을 직접 만들었는데, 뜻은 단순해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실험으로 확인한 것만 믿는다"는 거예요.
실제로 그는 프리즘으로 빛을 쪼개 무지개의 원리를 검증했고, 이를 바탕으로 광학 체계를 세웠어요.
광학이란 빛이 어떻게 굴절되고 반사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수사복을 입은 채 수도원 창가에서 프리즘을 들고 빛을 쪼개고 있는 그 그림, 꽤 기묘하죠.
"권위는 지식의 출발점이지 목적지가 아니에요."
베이컨이 평생 밀고 간 이 입장은 당시로선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전 생애가 18개월의 광기 어린 집필로 압축된 그 순간, 편지의 수신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어요.
1266년, 교황 클레멘스 4세가 베이컨에게 친서를 보냈어요.
내용은 단 하나,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나에게 보내시오."
회칙상 외부 저술이 금지된 베이컨에게, 교황이 직접 면제권을 쥐여준 셈이에요.
베이컨은 폭발했어요.
18개월 만에 '대저작(Opus Majus)', '소저작', '제3저작' 세 권을 써냈어요.
오늘날 학자들이 평생 못 채울 분량을 1년 반 만에 쏟아낸 거예요.
그 안에는 놀라운 내용이 가득했어요.
화약 제조법, 달력 개혁 제안, 확대렌즈의 원리, 심지어 "언젠가 사람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예언까지요.
13세기 수사가 자동차와 돋보기를 내다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책을 받아야 할 단 한 명의 독자, 클레멘스 4세가 1268년 원고가 도착하기 직전에 사망했어요.
베이컨의 평생이 압축된 원고는 답신을 받지 못한 채 보관함에 들어갔습니다.
인생 최대 발표를 준비한 날, 유일한 결정권자가 사라진 것이죠.

그를 감옥에 보낸 것은 이단심문관도, 왕도 아니었어요.
매일 아침 같은 식탁에서 빵을 나누던 형제들이었습니다.
1277년경, 프란치스코회 총장 제롬 다스콜리가 베이컨의 저작에 공식 판결을 내렸어요.
죄목은 '의심스러운 새로움(suspectae novitates)', 즉 기존 질서를 흔드는 불온한 생각이라는 거예요.
결국 베이컨은 수도원 내 감금형에 처해졌어요.
아이러니한 건, 그 제롬 다스콜리가 훗날 교황 니콜라우스 4세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베이컨의 입을 막은 사람이 기독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거죠.
하지만 그 반전보다 더 무거운 사실이 따로 있어요.
베이컨은 약 14년간 외부와 단절된 채 수도원 안에 갇혀 지냈어요.
그런데 멈추지 않았어요.
1292년, 마지막 저작 '신학 개요(Compendium Studii Theologiae)'에서도 동료 학자들의 무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단 한 줄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서약한 형제들이, 그들 중 가장 뛰어난 형제의 목소리를 14년째 지우려 했어요.
그래도 그는 쓰는 걸 멈추지 않았어요.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계속 쓸 수 있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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