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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790년 가을, 훗날 독일 철학을 바꿀 세 청년이 같은 책상 위 촛불 하나를 나눠 쓰고 있었다.
튀빙겐 신학교는 독일 남서부의 작은 도시에 있던 기숙 신학교로, 당시 독일에서 가장 뜨거운 지식인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그 기숙사 방 하나에 15세의 프리드리히 셸링, 20세의 프리드리히 횔덜린, 20세의 게오르크 헤겔이 함께 살았다.
셋은 그해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고 함께 흥분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기숙사 마당에 나가 직접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세상이 끝나고 새 시대가 온다는 믿음을 땅에 새긴 것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한 기숙사에서 노벨상 수상자 셋이 동시에 나온 셈이다.
횔덜린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고, 헤겔은 변증법으로 역사를 설명한 철학자가 됐다.
그리고 가장 어린 셸링이 셋 중에서 가장 먼저 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헤겔이 처음 예나에 도착했을 때, 그를 강단에 세워준 사람은 다섯 살 어린 셸링이었다.
1798년, 23세의 셸링은 예나 대학 정교수로 임용됐다.
예나는 당시 독일 철학의 중심지였고, 이 자리를 추천한 사람은 독일 최고의 문호 괴테였다.
그때 칸트는 73세, 헤겔은 28세였지만 아직 이름 없는 청년이었다.
셸링이 강의한 자연철학은 간단히 말하면 이런 생각이었다.
"자연은 그냥 돌멩이와 풀이 모인 게 아니라, 정신이 자기 자신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야."
당시 독일 낭만주의를 이끌던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같은 작가들이 이 사상에 매료돼 셸링의 강의록을 자신들의 교과서로 삼았다.
그런데 1801년, 헤겔이 예나에 도착했다.
직업도 돈도 지위도 없는 그에게 강사 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이 셸링이었다.
그 후 한동안 헤겔은 학계에서 그냥 "셸링의 친구"로만 통했다.

옛 친구의 책 한 권이 셸링의 펜을 30년간 멈춰 세웠다.
1807년,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출판했다.
독일 관념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이 책의 서문에서, 헤겔은 셸링의 핵심 개념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다.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이나 마찬가지다."
셸링이 '절대자'라고 부르던 개념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이며, 모든 차이를 초월한 통일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헤겔은 그게 결국 아무것도 구별 못 하는 어둠 속 말장난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건 사적인 다툼이 아니었다.
전 유럽이 읽는 책으로 출판된 공개적 결별이었다.
셸링은 1809년 『인간 자유의 본질』이라는 논문을 마지막으로 주요 저서 출판을 멈췄다.
자유란 무엇이며 악은 왜 존재하는가를 탐구한 이 글이 셸링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공개 메시지가 됐다.
같은 해 아내 카롤리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854년 사망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셸링은 단 한 권의 큰 책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강의는 멈추지 않았고, 연구실에는 미발표 원고가 산처럼 쌓여갔다.
헤겔이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럽을 호령하는 동안, 한때 그를 끌어준 셸링은 인쇄소에 원고를 보내는 일만 끝내 하지 않았다.
한물 간 줄 알았던 팝스타가 30년 동안 신곡 한 곡 없이 콘서트만 여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1841년 11월 베를린 강의실 앞줄에, 훗날 실존주의·마르크스주의·아나키즘을 만들 청년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66세의 셸링을 베를린 대학으로 불렀다.
왕이 직접 내린 임무는 명확했다.
"헤겔주의의 용 씨앗을 박멸하라."
헤겔은 이미 10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철학은 오히려 더 강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역사적 필연성과 이성의 전개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헤겔식 사고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다.
왕은 이 사상이 혁명의 씨앗이 될까 봐 두려웠다.
청강 명단이 지금도 전해진다.
키르케고르, 훗날 실존주의의 문을 연 덴마크 철학자가 앞자리를 잡았다.
옆에는 마르크스의 동지 엥겔스, 국가 폐지를 주장한 아나키즘의 창시자 바쿠닌, 르네상스 역사를 새롭게 쓸 역사가 부르크하르트가 자리를 채웠다.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다.
키르케고르는 몇 주 만에 실망하고 편지에 이렇게 남겼다.
"셸링은 시간이 아깝다."
엥겔스는 익명 팸플릿을 써서 셸링을 공개 공격했다.
셸링은 헤겔을 끝장내러 베를린에 갔지만, 정작 그 강의실에서 등을 돌린 청년들이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이었다.
1790년 기숙사 마당에 자유의 나무를 심었던 15세 청년은, 결국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씨앗을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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