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공론장 개념을 만든 철학자는 정작 자기 입으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났다.
구순구개열이란 입술과 입천장이 선천적으로 갈라진 채 태어나는 기형으로, 5살 무렵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발음 장애는 평생 남았다.
그는 2004년 교토상 수상 연설에서 이 사실을 직접 꺼냈다.
교토상은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노벨상에 견줄 만한 일본의 국제 상이다.
그 자리에서 하버마스는 이 신체적 조건이 자신의 의사소통 철학의 뿌리라고 고백했다.
훗날 그가 쓴 의사소통 행위이론은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진짜로 소통하는지를 분석한 철학이다.
그리고 공론장은 그 핵심 개념으로, 시민들이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여론을 만드는 공간을 가리킨다.
발음이 새는 입을 가진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제대로 된 대화란 무엇인가'를 평생의 질문으로 삼게 됐다는 것이 반전이다.
훗날 독일의 도덕적 양심이라 불릴 그 철학자는, 열다섯 살까지 히틀러 유겐트의 단원이었다.
히틀러 유겐트는 나치당이 운영한 청소년 조직으로, 1939년부터 전 독일 청소년에게 가입이 의무화됐다.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생이 특정 정당의 청소년 조직에 강제로 가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 살의 하버마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1945년, 모든 것이 뒤집혔다.
열여섯 살 하버마스는 라디오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들었다.
나치 전쟁범죄자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세계 앞에 낱낱이 고백하는 목소리였다.
거기에 강제수용소 다큐멘터리 영상까지 겹쳤다.
하버마스는 훗날 자서전적 글에서 이 순간을 "하룻밤 사이에 도덕적 의식이 깨어났다"고 표현했다.
어제까지 응원하던 팀이 사실은 끔찍한 일을 저질러왔다는 걸 갑자기 알게 된 청소년의 충격이었다.

1968년 봄, 하버마스는 자기 강의실을 점거한 학생들에게 "좌파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던졌다.
당시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적자로 여겨졌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세운 비판이론의 본산으로, 기존 사회 체제를 근본부터 뒤집어보는 학문 흐름이었다.
학생 운동가들에게 하버마스는 자신들의 정신적 선배였다.
그런데 그 선배가 등을 돌렸다.
독일 신좌파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루디 두치케가 이끄는 학생들의 폭력 노선을 향해, 하버마스는 공개적으로 "Linksfaschismus(좌파 파시즘)"이라고 선언했다.
"너희가 그렇게 욕하던 파시즘과 방법이 뭐가 다른가"라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는 명확했다.
하버마스는 좌파 진영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1971년,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슈타른베르크 막스 플랑크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평생 가장 거세게 싸운 상대는 나치를 변명하려 한 자국의 역사학자들이었다.
1986년, 보수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가 독일 유력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신문에 기고문을 실었다.
놀테의 주장은 이것이었다: 나치의 학살은 소련의 굴라크에 대한 방어적 반응으로 볼 수 있다.
굴라크란 소련이 운영한 강제노동 수용소 체계로, 결국 "우리만 나쁜 게 아니야"라는 논리였다.
57세 하버마스는 시사 주간지 디 차이트에 즉각 반박문을 보냈다.
이렇게 시작된 1년간의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은 일간지와 주간지 지면에서 벌어진 공개 논전이었다.
전후 독일이 나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묘한 반전이 있다.
"과거를 변명하지 말라"고 가장 거세게 외친 사람은, 한때 히틀러 유겐트의 단복을 입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그토록 절박했던 게 아닐까.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