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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데이비드 흄은 죽어가면서도 농담을 했어요.
1776년 여름, 그리스 신화의 저승 뱃사공 카론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해봐야 들어줄 것 같지 않다는 말을, 그는 침대에서 웃으며 내뱉었어요.
그 옆에는 제임스 보즈웰이 앉아 있었어요.
보즈웰은 당대 가장 유명한 전기 작가였는데, 이날은 특별한 장면을 기록하러 왔어요.
무신론자가 죽음 앞에서 마침내 신을 찾는 순간, 그 고백을 받아 적으려 한 거예요.
18세기 영국에서는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거든요.
하지만 흄은 끝까지 평온했어요.
보즈웰은 충격받아 몇 달간 악몽을 꿨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었어요.
절대 흔들릴 거라 확신한 사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때의 당혹감, 그것이 그날 보즈웰이 겪은 것이었죠.

오늘날 철학사 최고작으로 꼽히는 그 책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거의 아무도 읽지 않았어요.
흄은 23살이던 1734년 프랑스 라플레슈라는 작은 도시에 홀로 칩거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쓰기 시작했어요.
3년간 집필 도중 심한 신경쇠약과 위장병으로 무너져, 의사에게 편지로 자신의 증세를 호소할 정도였죠.
1739년 마침내 출판된 이 책에 대해, 흄 본인이 직접 이렇게 표현했어요. "출판기에서 사산아처럼 떨어졌다."
서평조차 거의 받지 못했어요.
몇 년을 바친 프로젝트가 출시 첫 주에 조용히 사라지는 경험, 그것을 20대 청년이 감당해야 했죠.
이 책이 던진 핵심 질문은 이거예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정말로 아는 건가?"
불은 뜨겁고 돌을 놓으면 떨어진다. 우리는 이런 걸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흄에게는 그게 전혀 당연하지 않았거든요.
그 의심을 끝까지 밀어붙인 책이었는데, 세상은 아직 그 질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철학사 가장 영리한 철학자의 공식 직함은 끝까지 사서였어요.
1745년 에든버러 대학 도덕철학 교수직 공모에서 흄은 탈락했어요.
성직자들이 집단으로 반대했거든요. "저 자는 무신론자이자 회의론자입니다."
7년 뒤인 1752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교수직도 같은 이유로 거부당했어요.
칸트가 훗날 "나를 독단의 잠에서 깨워준 사람"이라고 고백한 바로 그 사상가가, 대학 강의실에는 평생 한 번도 서지 못한 거예요.
업계 최고 실력자가 면접에서 매번 떨어지는 상황이 흄에게는 평생이었죠.
결국 그는 에든버러 변호사회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어요.
그리고 도서관 책상에서 6권짜리 '영국사'를 썼는데, 이 역사책이 오히려 그의 생계와 명성을 책임지게 돼요.
강단에는 설 수 없었지만, 서가 사이에서 당대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가 됐죠.
흄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그가 죽고 3년이 지나서야 인쇄되었어요.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라는 원고였어요. 신의 존재에 대한 전통 논증들, 이를테면 "세상이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으니 반드시 설계자가 있을 것이다"는 주장을 하나씩 해체하는 내용이었죠.
흄은 이 원고를 무려 25년 동안 책상 서랍에 묻어두었어요.
죽기 전, 절친이자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에게 사후 출판을 부탁했어요.
하지만 스미스마저 거절했어요.
결국 1779년, 흄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조카가 익명으로 출판했죠.
살아서는 단 한 번도 출판되지 못한 이 책이 18세기 말 유럽 철학 전체를 바꿔놓았어요.
이 책에 담긴 비판이 독일 철학자 칸트를 자극해 '순수이성비판'을 낳았거든요. '순수이성비판'은 인간 이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한 책으로, 이후 200년간 서양 철학의 기준선이 됐어요.
평온하게 농담하며 죽은 무신론자, 두 번이나 취직에 실패한 천재, 25년간 서랍에 묻어둔 원고.
그 서랍을 끝내 열기로 한 결정이 없었다면, 칸트도 없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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