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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졸업장에 '철학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었어요.
이 평가를 받은 청년이 훗날 서양 철학 전체를 다시 쓸 줄은, 그 평가를 쓴 교수도 몰랐을 거예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독일 튀빙엔 신학교를 졸업했어요.
튀빙엔 신학교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오늘날로 치면 명문 대학원 같은 자리였어요.
그런데 거기서 받은 졸업 평가가 바로 '철학 능력 부족'이었죠.
같은 신학교를 나온 동기 셸링은 스물셋에 이미 교수가 됐어요.
또 다른 동기 횔덜린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요.
헤겔은 서른 중반까지 남의 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그것도 모자라면 무급 강사로 생계를 이어갔어요.
입사 면접에서 "이 분야는 당신한테 안 맞는 것 같네요"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분야의 전설이 된 상황이에요.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고, 헤겔 본인도 그 시간을 버텨야 했어요.

원고 마감일에 창밖으로 대포 소리가 들렸어요.
헤겔은 도망치는 대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어요.
1806년 10월, 독일 예나 시내였어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군대가 도시로 밀려들고 있었고, 이틀 뒤 벌어진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완전히 무너져요.
헤겔은 바로 그 전날 밤, 자신의 첫 번째 대작 원고를 출판사로 보냈어요.
그 책이 바로 『정신현상학』이에요.
한마디로 설명하면,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발전해서 진리에 도달하는가"를 추적한 책이에요.
역사를 해석하는 책을 쓰는 동안, 역사 자체가 그의 창밖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헤겔은 거리에서 말을 탄 나폴레옹을 직접 봤어요.
그리고 친구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어요.
"나는 오늘 말 위의 세계정신(Weltseele zu Pferde)을 봤어."
세계정신이란 헤겔이 쓴 개념으로,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거대한 힘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시대의 흐름을 몸으로 구현한 사람"쯤 되는 표현이죠.
문제는, 그 세계정신의 군대가 바로 그날 밤 예나 시내를 약탈했다는 거예요.
마감 직전에 카페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창밖에서 시위대가 지나가고, 그 시위가 내가 쓰고 있는 바로 그 주제인 상황.
헤겔이 딱 그 상황이었어요.
원고와 현실이 동시에 완성된 하룻밤이었죠.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렇게 비꼬았어요.
"헤겔을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 헤겔 자신뿐이다."
그런데 그 이해 불가능한 책이 유럽 지성사의 방향을 바꿨어요.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한발 더 나아가 헤겔을 "사기꾼의 헛소리"라고 공격했어요.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쇼펜하우어 본인이 헤겔과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열었다가 수강생이 없어서 강의를 접었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해요.
헤겔의 강의실에는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거든요.
사용 설명서를 아무도 안 읽는데 그 제품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 아시나요.
『정신현상학』과 이후 대작 『논리학』이 딱 그랬어요.
끝까지 읽은 사람은 드물었지만,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넘쳤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은 훨씬 더 많았어요.
헤겔은 결국 베를린 대학교 총장 자리에 올랐어요.
난해함이 장벽이 아니라 권위가 된 드문 사례예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깊다는 것"으로 읽혔고, 그 깊이를 향해 사람들이 몰린 거예요.

마르크스는 헤겔을 읽고 혁명을 설계했어요.
프로이센 정부는 같은 헤겔을 읽고 왕권을 정당화했어요.
같은 책이었어요.
헤겔이 1831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은 둘로 쪼개졌어요.
'헤겔 좌파'는 기존 질서를 뒤엎는 도구로 헤겔을 읽었고, '헤겔 우파'는 현재의 국가가 이성의 완성형이라는 근거로 헤겔을 읽었어요.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 변호사가 같은 조항을 각자 유리하게 인용하는 장면, 그게 정확히 헤겔 철학에 일어난 일이에요.
마르크스는 헤겔의 핵심 개념인 변증법을 가져다 뒤집었어요.
변증법이란 쉽게 말해, "어떤 주장이 있으면 반드시 반론이 생기고, 그 충돌에서 새로운 진리가 나온다"는 사고방식이에요.
마르크스는 이 틀로 계급 투쟁과 혁명을 설명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의 뼈대를 세웠어요.
20세기로 넘어오면 이야기는 더 흥미로워져요.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소련 붕괴를 보며 헤겔의 '역사의 종말' 개념을 꺼내 들었어요.
역사의 종말이란 인류가 더 이상 더 나은 체제를 찾지 않아도 되는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으로,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그 끝점이라고 선언했어요.
혁명가의 교과서이자 보수주의자의 방패이고, 자유주의자의 선언문이기도 했던 철학.
한 사람이 쓴 문장이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간 경우는 역사에서도 드물어요.
어쩌면 그게 헤겔 철학이 진짜 뭔가를 건드렸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어려워서 누구든 자기 보고 싶은 걸 봤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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