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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국방부 지하 벙커가 아니라, 어느 부모님 아파트 거실에서 태어났다.
1936년, 베를린의 청년 콘라드 추제는 토목공학도였다.
그의 일과는 단순했다. 구조계산, 또 구조계산, 또 구조계산.
다리 하나를 설계하려면 같은 공식을 수백 번 손으로 풀어야 했다.
오늘날로 치면 엑셀에 같은 공식을 500번 복붙하다가 "이걸 자동화할 수 없나" 하고 검색해 보는 상황이다.
추제는 검색 대신 직접 만들기로 했다.
엑셀이 없던 시대에, 엑셀 자체를 발명하기로 한 셈이다.
그는 부모님 베를린 아파트 거실을 점거했다.
식탁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설계도면을 펼치고, 바닥에 얇은 금속 판 수천 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국가도, 대학도, 기업도 없었다. 청년 한 명과 부모님의 인내심만 있었다.

1941년, 인류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 컴퓨터가 작동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나라의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
Z3는 단순한 계산기가 아니었다.
미리 짜놓은 명령어 순서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진짜 의미의 자동 컴퓨터였다.
독일 항공연구소가 소액을 지원했지만, 나치 정권의 반응은 냉담했다.
"전쟁은 곧 승리로 끝난다. 이런 기계는 필요 없다."
같은 시기,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앨런 튜링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독일 암호를 해독하는 전자식 기계 '콜로서스'를 만들고 있었다.
한쪽은 컴퓨터로 전쟁을 이기려 했고, 다른 한쪽은 컴퓨터가 전쟁에 쓸모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추제와 튜링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같은 시대, 같은 아이디어, 완전히 다른 운명.
스타트업 창업자가 투자자에게 "시장이 너무 작다"며 거절당하는 상황과 정확히 같다.
다만 추제의 투자자는 나치 독일이었고, 그들의 판단은 역사상 최악의 오판 중 하나가 됐다.

1945년 봄, 독일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금과 식량을 챙겨 도망쳤다. 콘라드 추제는 컴퓨터를 마차에 실었다.
1943년, 연합군의 폭격이 베를린을 강타했다.
Z3는 그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추제는 이미 후속작 Z4를 만들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그는 완성 직전의 Z4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부품 하나하나를 포장해 마차에 싣고, 폭격이 쏟아지는 베를린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바이에른 알프스 산골의 작은 마을 힌터슈타인이었다. 오스트리아 국경 가까이, 인구 수백 명짜리 마을이었다.
이사할 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들고 갈지 고민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추제에게 그 선택은 폭격 속 탈출이었다.
그리고 그가 절대 버릴 수 없었던 짐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기계였다.
Z4는 결국 그 산골 마을 지하실에 숨겨졌다.
그리고 전후 유럽에서 최초로 상업 가동된 컴퓨터가 됐다.
그 선택이 옳았다.

포트란이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배웠다면,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고 추제는 알프스 산골에 묶여 있었다.
Z4는 지하실에 있었고, 세상은 혼란 속에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이를 꺼냈다.
1945년부터 1946년 사이, 그는 손으로 쓴 논문 더미를 완성했다.
이름은 플랑칼퀼이었다. 독일어로 "계획 계산법"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뼈대, 배열과 반복문과 조건문이 모두 이 논문 안에 있었다.
시대를 10년 이상 앞선 설계였다.
하지만 전후 독일은 논문 한 편을 출판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 논문은 서랍 속에서 잠들었다.
1957년, 미국 IBM이 포트란을 발표했다.
세계 최초의 상용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타이틀과 함께.
추제의 플랑칼퀼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72년이었다.
27년이 흘러 있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먼저 냈지만 발표 타이밍을 놓쳐 공을 빼앗긴 억울함, 학교 발표든 직장 회의든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그 감각이다.
다만 추제의 경우는 억울함의 단위가 달랐다.
냉전의 지정학이 한 사람의 업적을 27년 동안 지워버렸다.
추제는 1995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나는 때때로 내가 컴퓨터를 발명한 건지, 컴퓨터가 나를 발명한 건지 모르겠다."
부모님 거실 바닥에 금속 판을 늘어놓던 청년이, 폭격 속에서 마차를 끌던 남자가, 알프스 지하실에서 혼자 언어를 설계하던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손 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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