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확률론의 선구자는 처음부터 수학자가 되기로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야코프 베르누이는 가족의 뜻에 따라 신학을 공부했어요.
신학은 신과 인간, 성서와 믿음을 다루는 공부였고, 당시엔 안정적인 길이었죠.
그런데 그의 머리는 자꾸 다른 쪽으로 돌아갔어요.
낮에는 목사가 될 사람처럼 공부하고, 밤에는 별과 숫자를 붙잡는 청년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몰래 천체 물리학 강의를 밤새 듣는 사람에 가까워요.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을 읽는 공부예요.
그에게 별은 낭만이 아니라 계산해야 할 리듬이었어요.
그래서 수학은 취미가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숨은 규칙을 읽는 언어가 되었죠.
하지만 가족이 원하는 길과 그가 끌리는 길은 같지 않았어요.
베르누이는 한쪽 길을 완전히 버리기보다, 옆길을 파고들었습니다.
결국 그 옆길이 본길이 되었어요.
그는 바젤대학교 수학 교수가 됩니다.
바젤대학교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오래된 대학이에요.
목사의 문 앞까지 갔던 사람이, 우연과 무한을 계산하는 교실의 주인이 된 겁니다.
이 출발점이 묘해요.
우연을 계산한 사람의 첫 장면은 도박판이 아니었어요.
조용한 책상, 신학 책, 그리고 그 옆에 몰래 펼쳐진 수학 노트였죠.

베르누이가 발견한 것은 우연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우연도 오래 보면 패턴을 드러낸다는 사실이었다.
동전을 열 번 던지면 앞면이 여덟 번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만 번 던지면 이상하게도 반반에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큰 수의 법칙의 첫 모습이에요.
큰 수의 법칙은 같은 일을 아주 많이 반복하면 결과의 비율이 어떤 값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로 치면 동전 던지기 앱을 몇 번 눌렀을 때의 난장판과, 하루 종일 돌렸을 때의 균형이 다른 거예요.
베르누이는 이 생각을 Ars Conjectandi에 담았어요.
이 제목은 라틴어로 쓰인 책 이름이고, 우리말로는 “추측술”쯤 됩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는지 다룬 책이에요.
여기서 반전은 큽니다.
주사위는 원래 술집과 도박판의 물건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베르누이의 손에 들어가자, 주사위는 세상의 불확실성을 재는 도구가 됩니다.
그가 붙잡은 질문은 “이번에 무엇이 나올까?”가 아니었어요.
“아주 많이 반복하면 무엇이 드러날까?”였죠.
질문을 바꾸자 우연의 얼굴도 바뀌었습니다.
몇 번의 결과는 소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래 반복된 결과는 조용히 비율을 보여줘요.
그래서 베르누이의 확률은 점쟁이의 예언이 아니라, 흔들리는 세상을 오래 관찰한 사람의 계산이었습니다.
베르누이가 우연만 계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끝없이 늘어나는 합도 붙잡으려 했다.
숫자를 하나씩 더하는 일은 금방 지칩니다.
그런데 더해야 할 숫자가 끝없이 늘어난다면, 사람은 계산보다 먼저 포기하고 싶어져요.
무한급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수들을 계속 더하는 생각이에요.
마트 계산대에 물건이 계속 올라오는데, 줄이 끝나지 않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건 그 줄을 하나씩만 처리할지, 한꺼번에 읽는 방법을 찾을지예요.
베르누이는 거듭제곱의 합을 연구했어요.
거듭제곱은 같은 수를 여러 번 곱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3의 제곱은 3을 두 번 곱한 9이고, 3의 세제곱은 27이에요.
그가 남긴 계산의 흔적은 훗날 베르누이 수라고 불리게 됩니다.
베르누이 수는 복잡한 합을 다룰 때 나타나는 특별한 수열이에요.
수열은 숫자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도 Ars Conjectandi에 실렸어요.
그러니까 이 책은 우연만 다룬 책이 아니었습니다.
도박판의 주사위와 끝없는 합의 계산표가 같은 책 안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이 장면이 베르누이를 더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운을 맞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흩어진 반복을 보고, 그 안에서 계산 가능한 질서를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손으로 하나씩 더하던 일을 한 번에 처리하려는 욕망.
그 욕망이 베르누이 수를 남겼습니다.
수학은 여기서 종이 위의 노동을 줄이는 지름길이 되었죠.
베르누이의 무덤은 그가 사랑한 수학을 기리면서도, 바로 그 수학을 틀리게 새겼다.
평생 고른 문장을 졸업앨범에 잘못 인쇄당한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것도 하필, 자신이 가장 아끼던 문장과 그림이라면 더 아찔하죠.
베르누이는 무덤에 로그나선을 새기길 원했어요.
로그나선은 커져도 모양이 계속 닮아 있는 곡선입니다.
소라껍데기처럼 크기는 달라져도 느낌은 그대로 남는 나선을 떠올리면 쉬워요.
그는 라틴어 문구도 함께 원했습니다.
“Eadem mutata resurgo.”
뜻은 “변해도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른다”에 가깝습니다.
이 문장은 수학자에게 꽤 강렬해요.
나선은 커지고 변하지만, 자기 모습의 법칙을 잃지 않습니다.
베르누이는 그 성질을 자기 무덤에 남기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실제 묘비에는 다른 종류의 나선이 새겨졌다고 전해집니다.
정작 “변해도 같은 모습”을 말하려던 기념물이, 그 같은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한 셈이에요.
수학자의 마지막 농담처럼 보이지만, 당사자라면 웃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이야기가 오래 남는 이유는 단순한 실수담이라서가 아니에요.
베르누이가 평생 붙잡은 주제가 거기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것, 끝없이 이어지는 것, 변해도 같은 것.
그는 목사의 길 옆에서 수학을 배웠고, 주사위에서 법칙을 봤고, 끝없는 합에서 계산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변해도 같은 나선을 원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그를 기억하게 만든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 바로 그 틀린 나선이라는 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