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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인류가 피라미드를 짓던 4천 년 전, 사람들은 0이라는 숫자를 몰랐어요.
비밀번호에 0이 없고, 통장 잔고에 '0원'이 표시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그게 그 시절 인류가 살아온 세상이에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빈자리를 표시할 때 점 하나를 찍었어요.
101에서 가운데 0처럼 '뭔가 빠진 자리'를 알리는 용도였을 뿐, 그 점은 독립적인 수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0은 기호였지, 수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 상태가 4천 년 넘게 이어졌어요.
피라미드를 세우고, 달력을 만들고, 천문대를 지었는데, 정작 모든 수학의 출발점이 되는 0은 수 취급을 못 받았어요.
그러다 628년, 인도 수학자 브라마굽타가 이걸 바꿔버려요.
브라마굽타는 천문서 『브라흐마스푸타시단타』에서 영을 처음으로 수로 정의했어요.
별과 행성의 운동을 계산하기 위해 쓴 이 책에서 그는 "0에 어떤 수를 더하면 그 수 그대로다"라고 명시했고, 뺄셈과 곱셈 규칙까지 적었어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없음'이 수학적 권리를 얻은 순간이에요.
반전은 이거예요.
모든 수학의 출발점이 되는 수가 가장 늦게 도착했다는 거예요.
1이 있고, 10이 있고, 100이 있는데, 정작 0은 없었던 거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없음을 수로 셈하는 일은 거의 신성모독이었어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공허, 즉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어요.
존재한다는 건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데, 없음 자체는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거였죠.
이게 단순한 철학 주장이 아니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1천 년 넘게 서양 지식인의 세계관을 지배했고, 그 전통이 유럽 수학의 뼈대가 됐어요.
그래서 그리스 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의 기하학 책에도 0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요.
잔고가 '없습니다'와 '0원입니다'의 차이를 떠올려 보세요.
같은 상태인데, 두 번째 표현만 그 없음을 숫자로 다뤄요.
그리스인은 첫 번째까지만 허용했던 거예요.
그리스 수학은 비례와 도형의 학문이었어요.
"이 선분과 저 선분의 비율이 얼마인가"는 따질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값을 계산에 집어넣는 건 그들의 언어에 없는 개념이었어요.
결국 서양 수학의 토대를 세운 그리스인들이 가장 중요한 수를 1천 년 넘게 거부한 거예요.

1299년 피렌체에서 0을 쓴 상인은 벌금을 물어야 했어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렌체의 환전상 길드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0~9, 즉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장부에 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거예요.
로마 숫자, 그러니까 Ⅰ, Ⅱ, Ⅲ 같은 형태만 허용됐어요.
표면적 이유는 위조 방지였어요.
0과 6의 모양이 비슷해서 장부를 조작하기 쉽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 뒤에는 더 오래된 두려움이 있었어요.
교회는 0을 '피구라 니힐리(figura nihili)', 그러니까 '악마의 숫자'라고 불렀어요.
신은 있는 것을 만드는 분인데, 없음을 수로 다루는 건 신의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처럼 보였던 거예요.
없음이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가 종교적으로 위험했던 거죠.
오늘날로 치면 어느 도시가 스마트폰 계산기 앱을 법으로 금지한 것과 같아요.
그게 당시 피렌체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에요.
그런데 상인들은 그래도 비밀 장부에 0을 계속 적었어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수학 도구가 도시 법으로 불법이 됐는데, 결국 그 법이 졌어요.
0이 주는 편리함이 벌금보다 컸거든요.
역사는 언제나 더 편리한 쪽이 이겨요.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는 화면도, 0이 없으면 켜지지 않아요.
스마트폰은 매초 수십억 번의 전기 신호를 처리하는데, 그 신호는 딱 두 가지예요.
전기가 흐르면 1, 흐르지 않으면 0.
17세기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0과 1만으로 모든 수를 표현하는 이진법을 발명했어요.
이진법은 '없음(0)'과 '있음(1)' 두 상태로 수학 전체를 구현하는 방식인데, 이게 20세기에 컴퓨터의 언어가 됐어요.
피렌체가 악마의 숫자라 불렀던 그 0이, 결국 컴퓨터 언어의 절반이 된 거예요.
같은 17세기에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미적분도 만들었어요.
미적분의 핵심인 '극한'은 어떤 값이 0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따지는 거예요.
0이라는 개념 없이는 아예 출발할 수 없는 학문이에요.
피렌체가 0을 법으로 금지한 게 1299년이에요.
그로부터 400년이 채 안 지나 0은 인류 기술 문명 전체의 토대가 됐어요.
악마의 숫자가 결국 달에 가는 계산식을 완성한 거예요.
브라마굽타가 628년에 0에게 수학적 권리를 줬을 때, 그는 이게 어디까지 퍼질지 알았을까요.
1299년 피렌체 상인이 비밀 장부에 몰래 0을 적었을 때, 그는 법을 어기는 게 아니라 미래를 베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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