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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영어 교재의 진짜 발주처는 한국 교육부가 아니라 일본 통상산업성이었어요.
지금 카페 옆자리 청년이 들고 있는 토익 책, 그 역사의 출발점은 1970년대 도쿄의 회의실이에요.
1979년, 일본 통상산업성(MITI) 소속 관료 키타오카 야스오가 미국의 한 시험기관에 시험 제작을 의뢰했어요.
통상산업성은 오늘날의 경제산업성으로, 일본의 무역·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 기관이에요.
그가 원한 건 하나였어요. 일본 비즈니스맨의 영어 능력을 표준화된 숫자로 재는 도구.
당시 일본 기업들은 해외 진출을 가속하고 있었어요.
영어를 잘하는 직원이 필요한데, '잘한다'는 기준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기준을 직접 만들기로 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시험이 처음 시행된 건 그해 12월, 일본 안에서였어요.
수험자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직장인이었고요.
토익(TOEIC)이라는 이름 자체가 '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의 약자인데, 그 '국제 소통'의 대상이 처음에는 일본 기업의 해외 거래처였던 거예요.

한국 회사 인사팀에 도착하는 토익 성적표는, 사실 미국 뉴저지의 한 시험기관 컴퓨터가 채점한 결과예요.
일본이 발주하고 한국이 보는 시험을, 미국이 만들고 있는 구조예요.
키타오카가 의뢰한 곳은 ETS(Educational Testing Service)였어요.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에 본부를 두고, SAT(미국 대학 입학 시험)와 GRE(대학원 입학 시험), TOEFL(외국인 유학생 영어 시험)을 운영하는 비영리 시험기관이에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험 제작 기관이 토익도 만든 거예요.
그래서 토익 안의 영어는 일본식 영어가 아니에요.
ETS가 설계한 미국 비즈니스 영어예요.
"일본이 만든 시험"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한국 시험"은 더더욱 아닌, 국적이 묘한 시험인 거예요.
일본은 의뢰자였고 미국은 설계자였어요.
그리고 채점은 지금도 ETS가 담당해요.
한국 직장인이 서울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채우면, 그 결과가 사실상 미국 뉴저지의 서버를 거쳐 돌아오는 셈이에요.
비즈니스 의사소통을 평가한다는 시험이, 출시 후 27년 동안 응시자에게 단 한 마디도 말하게 한 적이 없었어요.
운전면허 시험에서 실기는 빼고 필기만 보고 면허를 내준 것과 비슷한 구조예요.
1979년에 시작된 토익은 오랫동안 듣기(LC)와 독해(RC) 두 영역만 측정했어요.
문제지를 읽고 답을 골라 표시하는 것, 그게 전부였어요.
"비즈니스 의사소통"을 평가한다고 했지만, 정작 대화의 핵심인 말하기는 없었어요.
말하기(Speaking)와 쓰기(Writing) 영역은 2006년이 돼서야 별도 시험으로 추가됐어요.
시험이 생기고 무려 27년이 지난 뒤였어요.
그 27년 동안 기업들은 이 점수를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을 가리는 근거로 사용했어요.
아이러니한 건, 말하기 시험이 추가된 지금도 한국 채용 시장에서는 기존 LC+RC 점수만 주로 요구해요.
의사소통 능력을 본다면서 말하는 능력은 거의 안 봐요.
처음 설계의 한계가 지금도 관성처럼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 토익의 가장 큰 소비자는 시험을 발주한 일본이 아니에요. 옆 나라 한국이에요.
일본 도쿄 서점에 가면 토익 코너는 한 줄인데,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토익 책이 한 층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한국에서 토익이 이렇게 커진 건 1990년대 후반이에요.
대기업들이 채용 전형에 토익 점수 컷을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토익 몇 점 이상만 서류 접수 가능" 이런 조건이 생긴 거예요.
일본에서 토익은 채용 가점 수준이에요.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점수가 없으면 지원 자체가 막히는 상황이 됐어요.
심지어 대학 졸업 요건에 토익 점수를 넣은 학교들도 생겼어요.
일본 기업 직원 연수용 시험이, 한국 대학생의 졸업 조건이 됐어요.
설계자도, 발주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한국에서 벌어진 거예요.
일본 관료가 자국 직원의 영어 실력을 재보려 의뢰한 시험이, 지금 한국 청년의 취업 문을 여닫고 있어요.
그 청년이 지하철에서 매일 밤 단어를 외우는 교재의 첫 번째 독자는, 1979년 도쿄의 일본 직장인이었던 거예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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