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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3명이 죽은 그날, 한국의 어떤 호텔도 스프링클러를 달 법적 의무가 없었어요.
1971년 12월 25일, 서울 충무로에 있는 대연각호텔에서 불이 났어요.
당시 22층짜리 고급 호텔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려는 투숙객들이 가득 차 있었죠.
새벽 불길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고, 163명이 숨지고 63명이 다쳤어요.
이 화재는 그 해 세계 최악의 호텔 화재로 기록됐어요.
하지만 진짜 충격은 따로 있었어요.
건물 어디에도 화재를 감지해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가 없었고, 비상구로 유도하는 피난 설비도 사실상 없었어요.
학교에서 어느 날 안전 수칙이 갑자기 50개로 늘어났다면, 그 전날 누가 크게 다쳤다는 뜻이에요.
한국의 소방법은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163명의 시신이 발견된 뒤에야, 한국은 처음으로 고층 건물 소방설비를 의무화하는 법체계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소방설비기사가 외우는 모든 조항 옆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 적혀 있어요.
도로 표지판이 왜 그 모양인지 아무도 묻지 않듯, 우리는 소방법 조항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 모른 채 살아요.
그런데 조항 하나하나를 따라가면, 거기엔 반드시 특정 날짜가 나와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는 피난 설비 기준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어요.
백화점 쇼핑객들이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숨지는 걸 보고, 법은 "비상구 유도 조명은 상시 켜져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구체화했어요.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에서는 192명이 연기에 질식해 목숨을 잃었어요.
불보다 연기가 더 빨리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이 그제야 법에 반영됐고, 방화구획과 연기 제어 기준이 새로 만들어졌어요.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는 건물 외벽 마감재가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줬어요.
드라이비트라고 불리는 외장재가 불길을 순식간에 퍼뜨렸고, 이후 법은 가연성 외장재 사용을 규제하기 시작했어요.
2018년 밀양 세종병원 화재 이후에는 요양병원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됐어요.
혼자 피하기 어려운 환자들이 밀집한 공간에 소방설비가 없었다는 사실이 법을 바꿨죠.
수험생이 형광펜으로 밑줄 치는 소방관계법규 조항 하나하나는, 실은 사망자 명단이에요.
법전이 곧 부고장인 거예요.

이 시험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시험 자체가 아니라, 매년 한국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예요.
소방설비기사 필기 합격률은 평균 25~35%, 실기는 20% 안팎이에요.
매년 3~4만 명이 응시하는데, 그 중 1만 명 이상이 탈락해요.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에요.
운전면허 시험이 매년 새 사고 케이스를 추가해서 문제를 바꾼다고 상상해보세요.
소방설비기사 시험이 딱 그래요.
새로운 참사가 발생하면 법령이 개정되고, 개정된 내용은 6개월 뒤부터 출제 범위에 들어와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겨요.
작년에 완벽하게 외운 조항이 올해는 달라져 있고, 그 차이가 시험 문제 두세 개를 결정해요.
"공부 범위가 바뀌는 게 아니라, 사회가 너무 자주 누군가를 잃기 때문에 법이 바뀌는 거야."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종종 나오는 말이에요.
합격률이 낮은 진짜 이유는, 한국에서 사람이 자꾸 화재로 죽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매년 출제 기준을 밀어붙이는 힘이 돼요.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카페 천장 위에는, 당신이 모르는 어떤 자격자의 도면이 그려져 있어요.
연면적 1,000제곱미터 이상의 건물, 그러니까 웬만한 카페, 학원, 병원, 아파트, 지하철역에 있는 소방시설은 소방설비기사 자격을 가진 사람의 설계와 감리를 거쳐야 해요.
천장 위를 달리는 스프링클러 배관, 복도에 박혀 있는 유도등, 계단실 방화문의 폐쇄 장치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도면을 통과했다는 뜻이에요.
좋은 심판일수록 경기 중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좋은 소방설비기사일수록 아무도 그 이름을 몰라요.
화재가 나지 않으면 존재 자체를 모르고, 화재가 났는데 사람이 살아남으면 그제야 "누군가의 설계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이 직업의 역설은 거기에 있어요.
가장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
1971년 크리스마스 새벽 대연각호텔에서 올라간 불길이 결국 수만 명의 도면으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심코 밟고 있는 바닥 아래 어딘가에, 그 도면의 흔적이 배관으로 깔려 있어요.
그걸 평생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사실은 누군가 그 일을 제대로 해놓았다는 증거인 거예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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