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당신의 눈은 평생 단 한 번도 세상을 직접 본 적이 없어요.
눈의 망막은 빛을 받아 2차원 신호로 변환할 뿐이에요.
그 신호를 받아 3차원 세상을 복원하는 건 전부 뇌가 하는 일이거든요.
비디오 게임 화면이 GPU가 매 프레임 새로 그려낸 렌더링이듯, 지금 당신이 보는 이 세상도 뇌가 매 순간 그려낸 렌더링이에요.
원본은 없어요.
뇌가 추측해 만든 모델만 있을 뿐이죠.
1867년, 독일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생리광학 핸드북』에서 이것을 처음으로 이론화했어요.
인간 시각의 물리·신경 메커니즘을 총정리한 이 책에서, 그는 시각을 '무의식적 추론'이라 불렀어요.
뇌가 망막의 신호를 토대로 세상을 끊임없이 추론하고 예측한다는 개념이에요.
결국 헬름홀츠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거예요.
"우리는 평생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뇌의 의견을 봐왔어."
착시는 그 '의견'이 틀렸을 때 증거로 잡히는 거예요.

같은 회색 두 칸을 자로 잘라 나란히 붙여 보여줘도, 당신 뇌는 끝까지 다르다고 우겨요.
1995년, MIT 시각과학자 에드워드 아델슨이 발표한 '체커보드 그림자 착시'가 바로 이 현상이에요.
체커보드 위에 초록 원기둥을 놓으면, 그림자 안쪽 칸과 바깥쪽 칸이 화면상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회색인데 전혀 달라 보여요.
흰 종이가 어두운 방에서도 하얗게 보이고, 검은 종이가 햇빛 아래서도 검게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뇌가 자동으로 조명 조건을 계산해서 '원래 색'을 복원하거든요.
이걸 색 항상성이라고 해요.
오늘 겪는 상황으로 치면, 카페에서 찍은 음식 사진이 밖에서 찍은 것보다 노랗게 나왔는데 우리 눈이 자동 보정해주는 바로 그 기능이에요.
체커보드 착시에서는 이 보정 기능이 너무 강하게 작동해서 뇌가 실수를 저질러요.
아델슨은 증명을 위해 두 칸을 회색 막대로 연결해서 보여줬어요.
이어진 상태에서는 같아 보여요.
하지만 막대를 떼는 순간, 뇌는 다시 "둘이 달라"라고 판정해버려요.
의지로도 보정이 안 돼요.
이미 알고 나서도, 다시 봐도, 뇌는 같다는 사실을 거부해요.
뇌가 틀렸다고 알면서도 뇌의 결론을 바꿀 수 없다는 게 가장 섬뜩한 부분이에요.
2015년 2월, 한 장의 드레스가 인류를 두 부족으로 갈랐어요.
스코틀랜드의 한 결혼식에서 찍힌 드레스 사진이 텀블러와 트위터에 올라왔고, 누구는 파랑-검정 줄무늬로, 누구는 흰색-금색으로 봤어요.
이른바 'The Dress' 사건이에요.
워싱턴대 조사 결과, 응답자의 57%가 파랑-검정, 30%가 흰-금이라고 답했어요.
단톡방에서 똑같은 사진을 두고 색이 다르다고 끝없이 싸워본 그 경험, 바로 이게 그 현상이에요.
픽셀은 하나인데 보는 사람마다 달랐어요.
이유는 아델슨의 착시와 같아요.
뇌가 사진 속 빛의 출처를 다르게 추론하거든요.
"이건 낮에 햇빛 아래서 찍혔어"라고 추론하면 흰-금으로 보이고, "이건 인공조명 아래서 찍혔어"라고 추론하면 파랑-검정으로 보여요.
실제 드레스 색깔은 파랑-검정이에요.
하지만 사진 속 배경 빛이 애매하게 파란 색조를 띠어서, 뇌가 "이건 그냥 흰 옷에 낮빛이 반사된 것"이라고 잘못 추론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진짜 무서운 질문이 나와요.
같은 픽셀을 보면서도 다른 세상을 봤다면, 어제 친구와 함께 본 영화가 정말 같은 영화였을까요?
착시는 뇌의 오작동이 아니에요.
착시는 뇌가 평소처럼 작동한 증거예요.
영국 서식스대 신경과학자 아닐 세스가 2017년 TED 강연에서 꺼낸 핵심이에요.
그는 이렇게 선언했어요.
"당신의 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적 현실을 환각하고 있다."
예측 처리(Predictive Processing)라는 이론인데, 뇌가 감각 신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먼저 다음 순간의 세상을 예측하고, 실제 감각 신호는 그 예측을 교정하는 보조 역할만 한다는 거예요.
스마트폰 자판이 다음 단어를 미리 띄워주듯, 뇌도 다음 0.1초의 시각을 이미 그려놓고 눈에서 들어오는 신호를 비교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경우 예측이 맞아서 우리는 현실을 보고 있다고 느껴요.
착시는 예측이 틀렸는데도 뇌가 수정을 거부한 순간이에요.
그래서 환각과 정상 시각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에요.
정도의 차이예요.
우리가 매일 보는 세상도 환각인데, 단지 잘 통제된 환각일 뿐인 거예요.
헬름홀츠가 1867년에 제기한 질문은 결국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가 본다고 느끼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뇌가 세상에 대해 가진 이론이고, 착시는 그 이론의 솔기가 드러나는 순간이에요.
그렇다면 다음에 착시 그림 앞에서 틀리더라도, 뭔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뇌가 너무 열심히 일한 증거니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