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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그의 이름은 그가 버려진 교회 이름에서 왔다.
평생 그 사실을 숨기지 않은 건 본인뿐이었다.
1717년 11월 16일 새벽,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세례당 '생장르롱' 계단에 신생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무 메모도 없었다.
교회 이름 그대로 '장 르 롱'이라 불리게 됐다.
친모는 마담 드 탱생이었다.
파리 지식인들의 살롱을 운영하던 귀족 출신 작가였다.
살롱이란 매저녁 귀족과 철학자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던 당대 파리의 지식 사교장이다.
친부는 포병 장교였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를 거두지 않았다.
익명의 돈이 전달됐고, 아이는 한 유리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그 여인은 글도 거의 읽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를 친아들처럼 키웠다.
훗날 그가 파리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백과전서》의 편집자로 이름을 날릴 때, 그의 서명에는 '달랑베르(d'Alembert)' 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백과전서》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최대 규모의 지식 편찬 프로젝트였다.
친모도 친부도 붙여주지 않은,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출생증명서 친부모 란이 영원히 빈칸으로 남은 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결국 자기 이름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달랑베르가 한 줄짜리 방정식을 써넣은 순간, 수학은 처음으로 시간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1747년, 스물아홉 살의 달랑베르는 '진동하는 현' 문제에 매달렸다.
바이올린 줄을 튕겼을 때 그 줄이 어떤 모양으로 떨리는가.
그것을 수식으로 쓰는 문제였다.
들리기엔 간단하다.
하지만 당시 수학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기존의 방정식은 '지금 이 순간의 상태'만 다룰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양이 바뀌는 것'은 수식 안에 담을 방법이 없었다.
달랑베르는 그 한계를 깼다.
그가 유도한 식은 ∂²y/∂t² = c²∂²y/∂x² 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편미분방정식이다.
편미분방정식이란, 하나의 방정식 안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변화를 동시에 담는 수식이다.
기타 줄을 튕긴 0.1초 뒤 줄의 정확한 모양을 그려낼 수 있는 공식이 처음 생긴 것이다.
이 방정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빛의 파동을 기술하는 맥스웰 방정식, 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 중력을 기술하는 아인슈타인 장방정식까지 모두 같은 형태의 편미분방정식 위에 서 있다.
달랑베르의 식이 없었다면 이 방정식들도 없었다.
같은 해, 다니엘 베르누이와 오일러가 달랑베르의 해에 반박하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그 논쟁은 결국 푸리에 급수의 씨앗이 됐다.
푸리에 급수란, 어떤 복잡한 파형도 단순한 사인파들의 합으로 분해할 수 있다는 발견이다.
오늘날 MP3 파일 압축, 의료 CT 스캔, 지진파 분석의 기초가 되는 바로 그것이다.

파리 최고의 살롱 주인이 그를 자식이라 부르려 했을 때, 달랑베르는 유리공의 아내가 있는 좁은 방으로 돌아갔다.
달랑베르가 유명해지자 친모 마담 드 탱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생 그를 모른 척했던 그 여인이 처음으로 "이 아이가 내 자식"이라고 인정하려 했다.
달랑베르의 답은 단 한 마디였다.
"당신은 단지 나의 계모일 뿐입니다. 진짜 어머니는 저 유리공의 아내입니다."
그는 친모를 평생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모 마담 루소와는 마흔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았다.
이건 보통 결정이 아니다.
친모는 파리에서 가장 권력 있는 살롱을 운영하던 귀족 출신 작가였다.
양모는 글도 거의 읽지 못하는 유리공의 아내였다.
달랑베르는 신분 상승의 기회와 친자 인정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거부한 셈이다.
어릴 때 자신을 버린 부유한 친부모가 30년 만에 "이제 우리가 너의 진짜 가족"이라며 찾아온다면, 사람들은 보통 어떤 선택을 할까.
달랑베르는 자신만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프리드리히와 예카테리나, 18세기의 가장 강력한 두 군주가 보낸 편지를 달랑베르는 같은 대답으로 돌려보냈다. 파리를 떠날 수 없다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 학술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거액의 연봉에 궁정 거처까지 보장하는 조건이었다.
달랑베르는 거절했다.
그러자 이번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편지를 보냈다.
황태자의 가정교사 자리로, 연봉 10만 리브르를 제시했다.
당시 파리 학자가 평생 모을 수도 없는 액수였다.
달랑베르는 또 거절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양모가 있는 파리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과전서 작업과 자신의 수학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도 파리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달랑베르의 처지는 간단하지 않았다.
그는 백과전서에 종교와 검열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고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두 왕의 제안 중 하나만 받아들였어도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 남았다.
1783년, 그는 평생 큰 재산도 모으지 못한 채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묘비조차 세워지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묻혔다.
교회 계단에 버려진 신생아는 자기 이름도 스스로 짓고, 인류 최초의 편미분방정식을 풀고, 두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끝내 유리공 아내의 아들로 죽었다.
그 묘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당신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그 순간, 달랑베르의 방정식이 그 소리 안에서 살아있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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