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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23살 신임 교수가 강단에 올라 19세기 수학을 통째로 재배치하는 선언을 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1872년 독일 에를랑겐 대학.
펠릭스 클라인의 교수 취임 강연이었는데, 정작 청중은 거의 없었어요.
당시 수학자들은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었어요.
기하학이 너무 많아진 거예요.
유클리드가 2000년 전에 정립한 기하학, 원근법과 투영에서 출발한 사영 기하학, 그리고 최근 등장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서로 다른 학문처럼 따로 놀고 있었어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란 "평행선은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2000년 된 공리를 깨고 나온 기하학으로, 구면 위에서는 평행선이 결국 만나거나 끝없이 멀어지기도 해요.
그러니까 수학자들 사이에서, 이게 다 기하학인데 왜 따로 공부해야 하냐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어요.
클라인의 답은 이랬어요.
"모든 기하학은 어떤 변환에서 변하지 않는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진을 예로 들어볼게요.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회전시켜도, 늘리거나 압축해도, 거울에 비춰도 여전히 같은 내용을 담은 사진이에요.
그렇다면 어떤 조작에도 변하지 않는 그 성질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 그게 기하학이라는 거예요.
각 기하학은 단지 "어떤 변환을 허용하느냐"가 달랐을 뿐이었어요.
유클리드 기하학은 거리와 각도를 보존하는 변환만 허용했고, 사영 기하학은 더 자유로운 변환까지 허용했죠.
클라인은 이 차이를 에를랑겐 프로그램이라는 선언 하나로 정리해버렸어요.
그런데 이 혁명적인 발표를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30년이 지난 뒤에야 수학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어요.
역사상 가장 적은 청중 앞에서 발표된 가장 중요한 강연 중 하나였던 셈이에요.

클라인의 편지 봉투가 책상에 도착할 때마다, 푸앵카레는 자기가 며칠은 더 빨라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1881년부터 1882년까지, 클라인은 당시 유럽 최고의 젊은 수학자로 꼽히던 프랑스의 앙리 푸앵카레와 치열한 편지 경쟁을 벌였어요.
푸앵카레는 20세기 초 수학과 물리학을 넘나들며 상대성이론의 기반도 닦은 인물로, 동시대에 그와 견줄 만한 수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두 사람이 겨루는 주제는 자기동형 함수였어요.
아무리 특정한 방식으로 변환해도 자기 자신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함수예요.
오늘날로 치면, 아무리 코드를 고쳐도 출력값이 흔들리지 않는 알고리즘을 누가 먼저 체계화하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것과 비슷해요.
클라인에게는 뼈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푸앵카레가 자기동형 함수의 핵심 유형에 "푹스 함수"라는 이름을 붙였거든요.
푹스는 클라인과 라이벌 관계이던 독일 수학자였어요.
클라인은 편지에서 강하게 항의했어요.
그 이론의 진짜 기여자는 자신인데 왜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붙느냐는 거였어요.
하지만 두 사람의 편지는 이상하리만치 정중했어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쪽 증명이 하루라도 먼저라는 걸 확인하려고 밤을 새웠어요.
같은 마감일을 앞두고 경쟁사 개발자가 매일 자기 진행 상황을 이메일로 보내오는 상황과 비슷해요.
그런데 이 경쟁이 클라인에게 예상치 못한 대가를 치르게 했어요.

32살에 쓰러진 그날 이후, 클라인은 평생 단 한 개의 중요한 새 정리도 증명하지 못했어요.
1882년 가을, 푸앵카레와의 경쟁이 절정에 달하던 순간이었어요.
클라인은 신경쇠약으로 쓰러졌어요.
신경쇠약이란 오늘날 말로 극심한 번아웃에 가까운 상태예요.
극도의 긴장이 오래 지속되다가 신체와 정신이 동시에 무너지는 거예요.
클라인은 약 1년간 연구를 완전히 멈춰야 했어요.
하지만 진짜 충격은 회복 이후였어요.
병에서 돌아온 그가 스스로 이렇게 선언했어요.
"나는 더 이상 창조적 수학자가 아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생각해볼게요.
30대 초반에, 자기가 수학을 더 이상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인 거예요.
30대에 번아웃이 와서 다시는 코드를 쓸 수 없게 된 천재 개발자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요.
그는 실제로 그 이후 새로운 정리를 거의 증명하지 못했어요.
19세기 후반 수학을 통합한 인물이, 자기가 통합한 그 분야를 직접 연구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 거예요.
하지만 클라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클라인은 더 이상 정리를 증명할 수 없게 되자, 정리를 증명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1886년 클라인은 괴팅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행정가로의 변신이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수확들이 나왔어요.
먼저 다비드 힐베르트를 데려왔어요.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수학 전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현대 수학의 기반을 다진 사람이에요.
클라인이 그를 괴팅겐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렀을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보다 더 파격적인 일이 있었어요.
클라인은 여성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던 시대에 에미 뇌터를 괴팅겐 강사로 들이는 일을 지지했어요.
뇌터는 오늘날 현대 대수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수학자예요.
당시 교수회의에서 여성은 강의실에 설 수 없다는 반대가 쏟아졌는데, 클라인은 그 압박을 버텨냈어요.
클라인은 또 수학과 물리학을 함께 연구하는 응용수학 연구소를 만들었어요.
당시 순수 수학과 물리학은 완전히 따로 노는 분야였는데, 그가 그 경계를 허물었어요.
결국 괴팅겐은 20세기 초 전 세계 수학자들이 배우러 오는 도시가 됐어요.
클라인 본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가 증명한 정리가 아니라, 그가 키우고 불러온 사람들이 된 셈이에요.
직접 골을 넣지 못하게 된 스트라이커가 감독이 되어 팀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것처럼요.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아요.
클라인 본인은 이 삶에 만족했을까요, 아니면 평생 32살의 그 가을을 떠올렸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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