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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3세 소녀가 죽은 수학자에게 매혹된 그날, 부모는 그녀의 촛불부터 빼앗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파리를 뒤집어놓던 여름, 소피 제르맹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몽튀클라의 <수학사>였다.
18세기에 쓰인, 수학의 역사 전체를 훑는 두꺼운 책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아르키메데스 이야기를 읽었다.
로마군이 시러큐스를 함락하는 혼란 속에서도,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에 그린 도형을 들여다보다 로마 병사의 칼에 찔려 죽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음 앞에서도 붙들어두는 학문이라면, 나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당시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수학은 여자 아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부모는 딸이 밤새 책을 읽는 걸 막으려고 촛불을 치웠고, 따뜻한 옷도 빼앗고, 난로 장작도 없앴다.
그런데 제르맹은 멈추지 않았다.
잉크가 얼어붙는 방에서 담요를 두르고 라틴어로 쓰인 수학책을 독학했다.
부모가 게임기를 압수할수록 더 몰래 빠져드는 청소년처럼, 억누를수록 집착은 깊어졌다.
딸을 지키려던 부모의 통제가, 오히려 평생의 집착으로 굳어진 출발점이 됐다.

그녀가 라그랑주에게 보낸 과제의 서명은 살아 있는 자기 이름이 아니었다.
1794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세웠다.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이공계 학교로, 오늘날로 치면 전국 상위 0.1%만 들어가는 최상위 이공계 대학이었다.
그런데 여성은 입학이 금지였다.
제르맹은 우회로를 찾았다.
학교를 그만둔 실재 남학생, 앙투안 오귀스트 르블랑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그 이름으로 강의 노트와 과제지를 빼내고, 해석학 담당 교수 라그랑주에게 과제를 제출했다.
라그랑주는 깜짝 놀랐다.
'르블랑'의 답안이 너무 독창적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러 갔다가, 그는 여성을 발견했다.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지만, 라그랑주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성 개발자가 차별이 두려워 남자 닉네임으로 오픈소스 코드를 올리는 오늘의 풍경처럼, 당시 제르맹에게도 가짜 이름은 유일한 입장권이었다.
남자 이름이 사라져야 비로소 진짜 천재가 보이는 시대였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가우스의 도시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가우스는 죽을 때까지 그녀를 남자로 알았을 것이다.
1804년, 독일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산술 연구>를 출간했다.
정수론을 근대 학문으로 정초한 책, 그러니까 숫자들 사이의 패턴을 엄밀하게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저작이었다.
제르맹은 이 책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녀는 다시 르블랑의 이름으로 가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관한 새로운 접근법이 담겨 있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란 "세 변이 정수인 직각삼각형"의 공식을 세 제곱 이상으로 확장하면 정수 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당시 150년째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수학계 최대의 미제였다.
제르맹은 'p와 2p+1이 모두 소수일 때'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제안했다.
훗날 이 접근법은 소피 제르맹 정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가우스는 르블랑을 "뛰어난 동료"라 불렀고, 두 사람은 8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체가 드러난 건 뜻밖의 경로였다.
1806년 나폴레옹 군대가 가우스의 도시 브라운슈바이크를 점령하자, 제르맹은 친분이 있던 페르네티 장군에게 부탁을 넣었다.
"그 도시에 가우스라는 수학자가 있는데, 다치지 않게 해줘요."
그 선의가 가우스에게 전달되면서 '르블랑'의 정체가 드러났다.
가우스는 이렇게 답장을 썼다.
"여성의 정신이 이 학문의 가시밭을 뚫는 데는 무한히 더 큰 용기와 재능이 필요합니다."
8년의 가짜 이름이 깨진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끊기는 대신 더 깊어졌다.

그녀가 죽은 뒤 사망진단서의 직업란에 적힌 글자는 수학자가 아닌 연금생활자였다.
1809년, 독일 물리학자 에른스트 클라드니가 파리에서 기묘한 시연을 펼쳤다.
진동하는 금속판 위에 모래를 뿌리면, 모래가 스스로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이 현상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에게 금메달을 주겠다고 공표했다.
수학자 라그랑주가 직접 "현존하는 해석학으로는 풀 수 없다"고 선언했고, 남성 수학자 중 아무도 응모하지 않았다.
오직 제르맹만이 익명으로 세 번 도전했다.
1811년에는 탈락했고, 1813년에는 가작을 받았다.
그리고 1816년, 세 번째 도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여성 최초의 수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상식에 들어갈 수 없었고, 아카데미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를 혼자 완성한 사람이 정작 발표 회의장 출입은 금지된 상황이었다.
1831년 제르맹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우스가 추진한 괴팅겐 대학 명예박사학위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결정됐다.
그리고 파리 시청이 발급한 사망진단서의 직업란에 쓰인 단어는 'rentier', 프랑스어로 연금생활자였다.
평생 수학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국가가 마지막으로 붙여준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소피 제르맹 정리를 가르치는 수학 교실에서, 우리는 지금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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