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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왕이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었어요.
그가 맞이한 사람은 군대도 사절도 아닌, 학자 한 명이었고요.
기원전 4세기 중국, 연나라의 소왕은 사상가 추연이 도착하는 날 직접 앞장서서 길을 쓸었어요.
오늘로 치면 대통령이 외국 학자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활주로를 직접 빗자루로 닦은 셈이죠.
소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갈석궁(碣石宮)이라는 궁전을 추연 한 사람만을 위해 새로 지었고, 그 앞에서 스스로 제자의 자리에 앉아 가르침을 청했거든요.
위나라 혜왕도 추연이 온다는 소식에 교외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고요.
그런데 같은 시대에, 맹자는 정반대의 상황을 겪고 있었어요.
맹자는 인의(仁義)를 설파하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왕들에게 박대받고 쫓겨나기 일쑤였거든요.
왕들이 원하는 건 도덕 강의가 아니라 부국강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추연만은 달랐어요.
왕들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무릎을 꿇었죠.
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했기에, 왕이 빗자루를 든 걸까요.

한 사람이 중국 전체가 사실은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했어요.
81분의 1, 그게 그가 그린 중국의 크기였거든요.
추연이 내세운 이론은 대구주설(大九州說)이에요.
당시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이 곧 '천하(天下)', 즉 세상 전체라고 믿었어요.
추연은 그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했어요.
그에 따르면 중국의 9주는 세계 81개 대륙 중 단 하나, 적현신주(赤縣神州)에 불과했어요.
적현신주란 "붉은 기운이 깃든 신성한 땅"이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중국을 대단해 보이게 포장한 이름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포장해도 81분의 1은 81분의 1이죠.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하기 1800년 전이었어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1700년 전이었고요.
그런데도 추연은 "중국 밖에 더 넓은 세계가 있다"고 말했어요.
더 놀라운 건, 그는 평생 중국 밖을 한 발도 나간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망원경도, 지도도, 해도도 없었어요.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도달한 결론이었죠.
오늘날 천문학자가 "우리 은하는 관측 가능한 우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할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을 거예요.
다만 그 천문학자에게는 허블 우주망원경이 있었고, 추연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왕조의 흥망에는 패턴이 있어요.
추연은 그 패턴을 다섯 글자로 압축했고, 진시황은 그 다섯 글자에 자기 제국을 끼워넣었거든요.
추연이 만든 이론은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에요.
쉽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우주의 모든 것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 다섯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어요.
왕조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나라는 이 다섯 원소 중 하나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요.
그리고 이 원소들 사이에는 서로 이기는 관계가 있어요.
물은 불을 끄고, 불은 쇠를 녹이고, 쇠는 나무를 베고, 나무는 흙을 뚫죠.
그러니까 다음 왕조는 앞 왕조의 원소를 이기는 기운을 가진 나라가 세운다는 논리예요.
진시황이 이 이론에 꽂혔어요.
그는 진(秦)나라를 수덕(水德), 즉 물의 기운을 가진 나라로 선포했거든요.
물은 불을 이기니, 불의 기운을 가진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것이 당연한 순리라는 논리였어요.
진시황은 거기서 더 나아갔어요.
수덕에 맞게 국가 공식 색을 검은색으로 정하고, 귀하게 여길 숫자도 6으로 통일했죠.
이론 하나가 제국의 색깔까지 바꾼 거예요.
추연 자신은 왕조를 정당화할 생각으로 이 이론을 만든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2000년 동안,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이 이론이 소환됐어요.
사상가가 만든 지도가 권력의 지형도가 되어버린 셈이죠.

추연은 10만 자가 넘는 글을 남겼어요.
지금 그의 책은 한 줄도 남아있지 않아요.
마지막이 화려하지 않았어요.
왕들이 직접 길을 쓸며 맞이하던 그 추연이, 훗날 연나라 혜왕 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거든요.
혜왕은 소왕의 뒤를 이은 왕이었지만, 전임자와는 전혀 달랐어요.
옥에 갇힌 추연은 하늘을 우러러 울었어요.
그러자 한여름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기록이 전해요.
이 이야기를 담은 책은 『회남자(淮南子)』인데, 한나라 시기에 여러 학자들이 당시까지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책이에요.
이 일화에서 "6월비상(六月飛霜)"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6월에 서리가 날린다는 뜻으로, "억울함이 극에 달하면 하늘도 움직인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예요.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억울한 사람을 위로하는 표현으로 쓰였죠.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더 쓸쓸해져요.
추연은 살아생전 10여 권, 10만 자가 넘는 저작을 남겼어요.
한나라 시기까지는 그 책들이 전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왕보다 높이 모셔지던 사람의 목소리가, 종이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거예요.
우리가 오늘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건 오직 『사기(史記)』,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 같은 책의 각주와 인용 덕분이에요.
노벨상급 학자의 논문이 전부 불타버리고, 그를 비판하거나 인용한 라이벌의 책 각주 속에서만 생각이 살아남은 것과 같죠.
왕보다 높이 모셔지고, 제국의 색깔을 바꾸고, 동아시아 세계관의 틀을 새로 짠 사람.
그런데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의 목소리는 단 한 줄도 직접 전해지지 않아요.
추연이 하늘을 보며 울었을 때, 과연 그는 무엇 때문에 울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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