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32년, 한 철학자가 2500년 이어진 형이상학 전체를 한 단어로 정리했어요.
바로 "무의미"라고요.
루돌프 카르납은 1921년 독일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논문 주제는 칸트의 공간론이었어요.
칸트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철학의 거인이에요.
그런데 그 칸트로 박사를 딴 사람이 11년 뒤, 칸트가 속한 전통 전체를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1932년 논문 "형이상학의 극복"에서 카르납은 이렇게 선언했어요.
"검증할 수 없는 명제는 인지적으로 무의미하다."
형이상학이란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처럼 실험실에서 확인할 수 없는 큰 질문들을 다루는 철학 분야예요.
비유하자면,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갑자기 "소설은 사실이 아니니까 전부 폐기해야 해요"라고 선언한 격이에요.
배운 것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깊이 부정할 수 있었던 거예요.

카르납은 하이데거의 강의실에 직접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그의 가장 유명한 문장을 "무의미의 표본"으로 논문에 박제했어요.
192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대형 학술 회의가 열렸어요.
당시 마르틴 하이데거는 유럽 철학계를 흔든 스타였어요.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탐구한 실존주의 철학자로, 그의 강의마다 청중이 넘쳤어요.
카르납은 하이데거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직접 들었어요.
그 강연에서 하이데거가 남긴 가장 유명한 문장이 있어요.
"Das Nichts nichtet." 우리말로 옮기면 "무는 스스로 무화한다"예요.
3년 뒤, 카르납은 논문에서 이 문장을 정확히 인용하며 이렇게 썼어요.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검증 가능한 의미를 전혀 담고 있지 않아요."
같은 학회에서 만난 동료의 대표 문장을 공개 논문에 "무의미의 표본"으로 등록한 거예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에요.
같은 학과 교수의 강의를 직접 들은 뒤, 학술지에 "저 교수가 한 말은 문법만 맞고 내용은 없어요"라고 실명으로 게재한 셈이에요.
하이데거는 카르납이 언어의 표면만 보고 깊이를 놓쳤다고 반박했지만, 카르납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카르납이 미국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는, 그의 평생 학설을 무너뜨릴 사람이었어요.
1935년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자 카르납은 미국으로 망명했어요.
하버드에서 젊은 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을 만났어요.
콰인은 카르납을 스승처럼 여겼고, 두 사람은 함께 세미나를 듣고 식사하며 가까워졌어요.
하지만 1951년, 콰인은 논문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를 발표했어요.
그 논문의 타깃은 카르납의 핵심 학설이었어요.
카르납이 철학의 기둥으로 세운 구분,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차이"가 사실은 흐릿하다는 거였어요.
분석명제란 "총각은 미혼이다"처럼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참인 문장이에요.
종합명제란 "오늘 서울에 비가 온다"처럼 경험으로 확인해야 참인 문장이에요.
카르납은 이 둘을 칼같이 나눌 수 있다고 믿었는데, 콰인은 그 경계가 사실 없다고 논증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그다음이에요.
이 논문이 나온 뒤에도 두 사람은 평생 서신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유지했어요.
자기 이론의 뼈대를 공개적으로 무너뜨린 후배와, 카르납은 계속 밥을 먹었어요.

형이상학을 폐기한 사람이 평생 꿈꾼 것은, 모든 언어를 대체할 완벽한 인공언어였어요.
카르납은 14살 때부터 에스페란토를 사랑했어요.
에스페란토란 19세기 말 유럽에서 설계된 인공언어예요.
"전 세계 사람이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자"는 꿈으로 만들어진 언어인데, 카르납은 죽을 때까지 이 언어를 사용했어요.
그의 진짜 목표는 더 컸어요.
모든 과학 명제를 모호함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이상언어"를 만들고 싶었어요.
1934년 출판한 "언어의 논리적 구문"이 그 꿈의 결실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묘한 역설이 생겨요.
형이상학은 "검증 불가능하니 무의미하다"고 폐기한 사람이, 정작 아무도 실제로 쓰지 않을 완벽한 논리 언어를 평생 설계하고 있었어요.
완벽한 보편언어라는 꿈 자체가, 어쩌면 그가 평생 거부한 형이상학과 닮아 있었던 건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