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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교회를 가장 날카롭게 풍자한 사람은, 그 교회의 사제가 어겨서는 안 될 규율 때문에 태어난 아이였어요.
1466년경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사제의 사생아였어요.
가톨릭 사제는 독신을 서약해야 해요.
그 서약을 어긴 결과로 태어난 아이가 에라스무스였던 거예요.
비유하자면 이런 처지예요.
부모님이 회사 취업 규정을 어겨서 자신을 낳았는데, 정작 본인은 평생 그 회사의 감사 부서에서 일하게 된 사람.
아이러니가 출생부터 시작된 거예요.
그는 수도원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사제 서품까지 받았어요.
하지만 정작 수도원 생활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바쳤어요.
교회 안에 있었지만, 교회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사람이 된 거예요.

16세기 가장 위험한 책 한 권은 친구 집 손님방에서 일주일 만에 농담처럼 쓰였어요.
1509년 에라스무스는 영국에 살던 친구 토마스 모어의 집에 머물고 있었어요.
토마스 모어는 훗날 헨리 8세에게 처형당하는 영국 대법관이에요.
그 친구 집 손님방에서 에라스무스는 딱 일주일 만에 라틴어 풍자서 《우신예찬》을 완성했어요.
《우신예찬》은 이런 책이에요.
'어리석음의 여신'이 직접 무대에 나와서 세상의 바보들을 차례로 소개하는 형식이에요.
그 바보 목록에 수도사, 신학자, 그리고 교황이 들어있었어요.
책은 16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오늘날로 치면 SNS 풍자 계정이 바이럴되면서 단행본으로 나와 수십만 부 팔린 격이에요.
그런데 그 안의 내용이 교황을 정면으로 조롱하는 거였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루터의 망치 소리는 에라스무스가 만든 책 한 권에서 시작됐어요.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그 망치를 든 적이 없어요.
1516년 에라스무스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펴냈어요.
당시 가톨릭이 표준 성경으로 쓰던 라틴어 불가타 성경에는 오역이 수백 곳 있었어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경은 그 오류들을 고스란히 드러냈어요.
1년 뒤 독일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이자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이 책을 토대로 95개조 반박문을 써요.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진 선언문이에요.
그게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어요.
당대 사람들은 이걸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고, 루터가 부화시켰다."
하지만 정작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손을 잡지 않았어요.
1524년 《자유의지론》을 써서 루터와 공개적으로 결별했고, 끝까지 가톨릭에 남았어요.
자기가 만든 코드를 누군가 포크해서 회사를 뒤엎었는데, 정작 그 코드를 만든 사람은 원래 회사에 남아서 그 사람과 싸우게 된 거예요.
씁쓸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처지예요.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모자를 보냈어요.
그는 받지 않았고, 그래서 어느 누구의 사람도 되지 않았어요.
1535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에라스무스를 추기경에 임명하려 했어요.
추기경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 바로 다음 가는 자리예요.
종교개혁으로 흔들리는 가톨릭 진영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에라스무스가 필요했던 거예요.
에라스무스는 거절했어요.
공식 이유는 건강과 나이였어요. 이미 60대 후반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추기경이 된다는 건, 가톨릭 진영의 공식 대변인이 되는 거였어요.
그는 1536년 가톨릭 신자로 숨을 거뒀어요.
하지만 죽은 장소는 종교개혁이 이미 승리한 도시 바젤이었어요.
그리고 사후에 그의 모든 저작은 가톨릭 금서 목록에 올랐어요.
평생 가톨릭 진영에서는 "왜 루터 편을 드느냐"는 비난을 들었고, 루터 진영에서는 "왜 가톨릭에 남아있느냐"는 비난을 들었어요.
양쪽 모두에게 미움받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덕분에 그는 어느 진영의 도구도 되지 않았어요.
추기경 모자를 거절한 사람이 죽고 나서 금서 목록에 오른다는 건, 어쩌면 그가 끝까지 제대로 된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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