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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69년 봄, 22살의 한 여자는 자기 결혼식에 아버지가 오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이 여자가 특이한 건 아버지가 억울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아버지 조지 크레이븐은 필라델피아의 성공한 보수적 변호사였고, 딸은 WASP 가문의 외동딸이었어요.
WASP란 앵글로색슨계 신교도의 약자로, 미국 건국 이후 수백 년간 사회 최상층을 점유해온 백인 엘리트 집안을 뜻해요.
그 딸이 유대인 언어학자와 결혼하겠다고 했고, 유대교로 개종까지 하겠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결혼식 참석을 거부했고, 사실상 의절이 시작됐어요.
이 여자가 바로 마사 누스바움이에요.
결혼 상대는 언어학자 알란 누스바움이었고, 마사는 그와 결혼하며 가문의 성과 종교를 모두 바꿨어요.
단순한 반항이었을까요?
그렇게 보기엔 마사가 포기한 게 너무 많았어요.
필라델피아 명문가 외동딸이 누리던 인맥, 재산, 사회적 지위가 결혼 한 번에 모두 끊겨버렸거든요.

그녀의 책상 위에는 35편의 논문과 두 권의 책이 쌓여 있었지만, 하버드는 그것을 "철학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어요.
1975년, 누스바움은 하버드 고전학과 조교수로 임용됐어요.
그리스·로마 고전 철학을 전공한 학자로, 당대 가장 많은 글을 쓰는 철학자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1980년대 초 종신직 심사에서 탈락했어요.
종신직이란 한 번 받으면 은퇴할 때까지 자리가 보장되는 정교수 자리예요.
오늘날로 치면 수십 년 경력을 쌓은 계약직이 정규직 전환에서 떨어진 셈이에요.
이유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하버드 고전학과의 보수적 어문학자들이 누스바움의 연구 방식 자체를 문제 삼은 거예요.
그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때 문학적 분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동료들은 "진짜 철학이 아니다"라고 봤어요.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이 낯설다는 이유로 탈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35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35편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1985년 브라운대로 이직한 후, 누스바움은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어요.
"여성이라는 이유와 분야를 넘나든다는 이유로 두 번 거부당한 시간이었어요."

1993년 콜로라도 법정에서 누스바움은 그리스어 번역 한 단어 때문에 동료 학자들로부터 "위증"이라는 단어를 들었어요.
당시 콜로라도주에는 논쟁적인 법안이 있었어요.
수정헌법 2조(Amendment 2)라는 이 조항은 동성애자를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지방 조례들을 주 헌법으로 무효화하는 내용이었어요.
쉽게 말하면, 주 전체가 동성애자 차별을 다시 합법화한 거예요.
누스바움은 차별금지 측 전문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어요.
보수 측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동성애를 비도덕으로 단죄했다는 논리를 폈어요.
그런데 누스바움이 그리스어 원문을 직접 분석하며 그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어요.
문제는 여기서 나왔어요.
반박에 사용된 핵심 단어 tolmêma의 해석을 두고, 보수 성향 정치철학자 로버트 조지 등 동료 학자들이 강하게 반발한 거예요.
tolmêma는 그리스어로 "만행"으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동료들은 누스바움이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오역했다고 주장했어요.
일부는 "학문적 위증에 가깝다"는 표현까지 썼어요.
법정이 아니라 학회지에서 공개적으로 항의서를 올린 거예요.
그 재판은 결국 누스바움이 지지한 쪽, 즉 차별금지를 되살리는 쪽이 미국 대법원에서 이겼어요.
하지만 누스바움의 이름에는 한동안 "오역 논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어요.

누스바움은 한 나라가 발전했는지를 GDP 대신 그 나라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로 측정하자고 제안했어요.
가문도 잃고, 하버드도 잃고, 위증 의혹까지 받은 누스바움이 1980년대 후반부터 한 일은 완전히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거였어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역량 접근법(Capabilities Approach)을 발전시킨 거예요.
역량 접근법은 이런 거예요.
어떤 나라가 잘 사는지를 평균 소득으로 따지지 말고, "그 나라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따지자는 거예요.
오늘로 치면 월급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는지, 사랑할 수 있는지, 떳떳하게 길을 걸을 수 있는지를 따지는 셈이에요.
누스바움은 10가지 핵심 역량 목록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어요.
신체 건강, 감정을 느끼는 자유, 놀 수 있는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 같은 것들이었어요.
경제학 숫자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던 것들이에요.
그리고 이 이론이 결국 UN 인간개발지수(HDI)의 철학적 토대가 됐어요.
HDI는 오늘날 세계 각국의 발전 정도를 비교할 때 쓰는 국제 지표예요.
반전은 여기에 있어요.
가문 유산도, 하버드 종신직도, 법정에서의 명예도 잃은 사람이 결국 "인간이 무엇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의 새 기준을 만들었으니까요.
혹시 이 순서가 우연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특권을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사람이 그것을 직접 잃어본 뒤에야, 진짜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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