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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킵 손이 1972년에 약속한 것은, 인류가 한 번도 측정해본 적 없는 크기의 흔들림을 잡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흔들림의 크기는 양성자 지름의 1만 분의 1이에요.
양성자는 원자핵 안에 들어 있는 입자인데, 그걸 다시 1만 분의 1로 잘라야 하는 수준이죠.
비유하자면 이래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1000킬로미터 떨어진 강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꼬리를 한 번 흔들었을 때 생기는 파문을, 부산 앞바다에서 잡겠다는 거예요.
동료 물리학자들 대부분이 "평생 안 된다"고 했고, 손 본인도 그게 50년이 걸릴 줄은 몰랐어요.
1972년 MIT 워크숍에서 손은 레이저 간섭계를 이용한 실험을 제안했어요.
레이저 간섭계란, 레이저 빛을 두 방향으로 동시에 쏜 뒤 돌아오는 시간 차이로 아주 작은 거리 변화를 측정하는 장치예요.
훗날 이것이 LIGO(라이고), 즉 중력파 관측소가 돼요.
그런데 중력파가 뭐냐고요.
중력파는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예측한 거예요.
무거운 천체 두 개가 서로를 향해 돌다가 충돌하면, 그 충격이 물 위의 파문처럼 우주 공간을 퍼져 나간다는 거죠.
문제는 지구에 도달할 때쯤이면 그 파문이 워낙 작아진다는 거예요.
아인슈타인 본인도 "인간이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썼어요.
그 불가능한 실험을 손은 1972년에 하겠다고 했고, 강당에 앉아 있던 동료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어요.

1974년 킵 손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잡지 구독권 하나를 걸고, 우주에서 가장 무거운 천체에 대한 16년짜리 내기를 시작했어요.
걸린 건 작았지만 주제는 엄청났어요.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강력한 X선을 내뿜는 천체 백조자리 X-1이 진짜 블랙홀인지 아닌지였거든요.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중력이 강한 천체예요.
1974년 당시에는 블랙홀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되지 않았어요.
백조자리 X-1은 "아마도 블랙홀일 것"이라는 후보 1순위였고, 손은 "이건 블랙홀이다" 쪽에 걸었죠.
그런데 호킹은 반대편에 걸었어요.
이유가 재밌어요.
호킹은 "만약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나오면 그건 내 이론이 맞다는 뜻인데, 내기에서 져도 손해가 아니잖아요. 일종의 보험이에요"라고 농담했거든요.
1990년, 16년 뒤에 호킹은 패배를 인정했어요.
그리고 손에게 펜트하우스 1년 구독권을 보냈어요.
성인 잡지였는데, 손의 부인이 받아들고 화를 냈다고 해요.
회사 동료끼리 점심 내기를 걸었다가 16년 뒤에야 결제하는 셈이에요.
그게 물리학자들의 시간 감각이에요.
그리고 그 내기는 결국, 블랙홀이 실재한다는 과학사의 전환점 중 하나로 기억돼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은 킵 손이 영화사에 넘긴 방정식의 결과물이었고, 영화가 개봉된 뒤 그 장면은 학술 논문 두 편이 됐어요.
2014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SF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손은 단순 자문이 아니었어요.
그는 공동 제작자로 참여해 시각효과 회사 더블 네거티브에 자신의 중력 방정식을 직접 건넸어요.
더블 네거티브 팀은 그 방정식을 그대로 컴퓨터에 입력했어요.
그러자 화면에 뭔가 이상한 것이 나타났어요.
블랙홀 주변을 도는 빛의 고리가 교과서 그림과 전혀 달랐거든요.
실제로는 블랙홀 위아래에서도 빛이 휘어져 보인다는 걸 방정식이 보여준 거예요.
그 결과는 너무 정확해서, 영화 팀과 손은 그것을 학술 논문 두 편으로 정리해 발표했어요.
영화 한 편이 학술지에 실린 셈이에요.
노벨상 수상자가 SF 영화 자문을 하다가 논문을 쓴 사례는 거의 없어요.
그리고 인터스텔라 덕분에 수백만 명이 처음으로 블랙홀의 진짜 생김새를 봤어요.
교과서보다 영화 스크린이 먼저 정확한 블랙홀을 보여준 해가 2014년이에요.

킵 손이 1972년에 약속한 진동은 43년 뒤 어느 새벽, 0.2초 동안만 들렸고, 그 0.2초가 그를 노벨상 시상대로 데려갔어요.
2015년 9월 14일 미국 동부시간 새벽 5시 51분, LIGO 검출기 두 대가 동시에 신호를 잡았어요.
13억 광년 밖에서 두 블랙홀이 충돌할 때 발생한 중력파였어요.
13억 광년이 어느 정도냐면요.
빛이 13억 년 동안 날아야 닿을 수 있는 거리예요.
그 충돌의 파문이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에 도달했을 때, 신호는 딱 0.2초 동안만 지속됐어요.
그 0.2초가 손이 43년 동안 만들어온 장치의 전부였어요.
1972년에 제안했고, 수십 년간 예산을 설득했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했어요.
그리고 2015년 새벽에 한 번 울렸어요.
2017년, 킵 손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어요.
시상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이제 우주를 귀로 듣기 시작했어요."
중력파 관측은 빛으로만 우주를 봐온 인류가 처음으로 "소리"를 들은 사건이에요.
망원경 대신 청진기를 갖게 된 셈이죠.
그리고 그 청진기를 만드는 데 청춘부터 노년까지가 몽땅 들어갔어요.
43년이에요.
하나의 약속을 지키는 데 43년이요.
당신이라면 그 내기를 끝까지 들고 갈 수 있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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