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매클로린이 대학 졸업장을 받은 해, 그는 14살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2학년이 대학원 논문을 쓴 셈이에요.
1709년, 스코틀랜드 소년 콜린 매클로린은 11세에 글래스고 대학 문을 열고 들어섰어요.
그가 석사 학위를 받으며 쓴 논문의 제목은 「중력에 관하여(De Gravitate)」였어요.
뉴턴의 역학을 라틴어로 재구성한 논문으로, 14살 아이가 당시 최첨단 물리학을 통째로 정리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5년 뒤, 19세의 매클로린은 마리샬 칼리지(지금의 애버딘 대학) 수학교수가 됐어요.
고등학생 나이에 교수 자리에 앉은 거예요.
18세기 영국 수학계 전체를 통틀어 이 기록을 넘어선 사람은 없었어요.
평범한 신동이 아니라, 당대의 신기록 그 자체였던 거예요.

뉴턴은 매클로린을 에딘버러로 데려오기 위해 자기 주머니를 열었어요.
1725년, 에딘버러 대학이 수학교수 자리를 채우려 할 때 아이작 뉴턴이 직접 나섰어요.
그때 뉴턴은 80대 노인이었고, 매클로린은 아직 이름을 크게 알리지 못한 젊은 수학자였어요.
뉴턴은 학교 측에 직접 편지를 보내 매클로린을 강력히 추천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봉급의 일부, 연 20파운드를 자기 사비로 보태겠다고 제안한 거예요.
회사 회장이 신입 한 명을 데려오겠다며 자기 통장에서 월급을 보태겠다고 한 격이에요.
당시 영국 과학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젊은이를 위해 그렇게 한 거예요.
뉴턴이 보기에 매클로린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거예요.

한 주교의 짧은 조롱 한 편을 반박하기 위해, 매클로린은 8년 동안 763쪽을 썼어요.
1734년, 조지 버클리 주교가 「분석가(The Analyst)」라는 짧은 논쟁서를 발표했어요.
뉴턴의 미적분이 쓰는 '무한소' 개념이 신학의 기적보다 더 모호하다고 조롱한 글이에요. 무한소란 0도 아니고 딱 떨어지는 수도 아닌, 그냥 '아주 작은 어떤 것'이라고 얼버무리는 개념이에요.
"수학자들이 신앙을 비판하는데, 그 수학 자체가 엉터리 아닌가요?"라는 논리였어요.
SNS에 올라온 짧은 도발 한 편이 수학계 전체를 흔든 셈이에요.
매클로린은 그 도발을 8년 동안 가슴에 품었어요.
1742년, 「유율법론(Treatise of Fluxions)」이 나왔어요.
뉴턴식 미적분을 엄밀한 기하학적 논리로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린 763쪽짜리 책이에요.
한 사람의 조롱에 답하기 위해 학문 하나를 통째로 다시 세운 거예요.

매클로린의 사인은 수학이 아니라 흙더미와 추위였어요.
1745년, 스코틀랜드에서 자코바이트 반란이 터졌어요.
스튜어트 왕가 복위를 노린 군사 봉기로, '보니 프린스 찰리'라 불린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끄는 반란군이 에딘버러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어요.
47세의 수학교수 매클로린은 강의실을 떠났어요.
도시 외곽에 참호를 파고 방어 보루를 설계하는 일에 자원한 거예요.
대학 교수가 갑자기 흙과 돌을 직접 나르기 시작한 거예요.
한겨울 추위 속에서 몇 달을 버텼어요.
하지만 도시는 결국 함락됐고, 매클로린은 잉글랜드 요크로 피신했어요.
그리고 이듬해 1746년 6월, 47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11살에 대학에 들어가 19살에 교수가 됐고, 뉴턴의 후원을 받았고, 주교의 조롱에 763쪽으로 응수했던 그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 성벽과 흙더미였어요.
그런 삶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1
개